[타향에서] 진정한 문명인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회장)

지난 연말 오랜만에 온가족이 고향 나들이를 함께 했다. 큰 아이가 대학이 확정되자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여 가족이 함께 움직인 지 오래된 차에 실행에 옮긴 것이다.

 

평소 지방을 다녀올 때엔 KTX를 이용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무궁화호를 탔다. 조금은 느긋하게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마음을 느긋이 가질 때 삶의 구석구석이 보다 잘 보이는 법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가족간에 오붓한 대화를 나눈 것 또한 오랜만에 덤으로 맛본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은 느림에서 나온다.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은 우리를 성찰로 이끌어 준다. 약간의 불편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지난해 초 행사 참석 차 뉴욕 가는 길에는 처음으로 가족을 대동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새 출발을 격려하며 보다 큰 꿈을 갖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0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맨해튼 시가지를 통해 인간 성취의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맨해튼을 다녀 온 지 10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번에는 최첨단 문명의 반대편에 있는 지평선의 고장 김제를 찾은 것이다.

 

맨해튼과 농촌 모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모습은 완전 딴판이다.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화려하고 바쁜 도시의 일상이 농촌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타자와의 비교 우위에 서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로 얻는 신기루인 부와 명예와 권력을 향해 돌진한다. 삶의 본질인 감사와 사랑, 정직, 상생을 딴 세상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드넓은 평야를 보면서 십수년 전에 읽었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의 인디언 추장들의 문명인들을 향한 준엄한 꾸짖음을 들었다. '풀들도 인간처럼 가족을 이루고 살고 추장도 갖고 있다. 따라서 약초를 캐러 가는 사람은 약초의 추장에게 존경심을 표해야 하고, 꼭 필요한 만큼의 풀만 채취하여 좋은 목적에만 사용할 것임을 밝혀야 한다.' 이러한 통찰은 정직한 대지와의 교감을 통해 얻은 것이리라. 이를 통해 인디언들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의미와 진리를 아는 최고의 문명인이요, 문명인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진리를 모르는 야만인임을 깨닫는다.

 

최근 구제역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어찌 소 뿐이겠는가만, 오래 전 한우를 기르던 친구의 말이 차가운 눈발로 가슴을 때린다. '소는 도축장으로 싣고 가는 트럭에 오를 때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차마 볼 수 없어 자리를 피한다.'는. 숱한 생명체가 무참히 살처분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러고도 진정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 인사파동, 함바게이트, 이미 불어 닥친 환경이변, 머잖아 닥쳐올 식량난, 식수난 등등 산적한 문제들의 발생 연원을 깊이 살펴보면, 인디언보다 못한 미개인들이 그동안 가짜 문명인 행세를 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대지는 정직하다. 대지를 경작하며 정직함을 배운 농민들 역시 정직하다. 지난번 고향 나들이에서 다시금 확인한 또 하나의 수확이다. '우리는 진리의 책을 가져본 일이 없고 누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책에 적어놓고 찬양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고, 진리가 곧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는 진리의 책이 아무 필요 없다.'는 인디언 추장의 메아리가 맨해튼, 고향 풍광과 겹친다.

 

*외길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회장은 김제 출신으로 전북대 국문학과와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를 졸업했다. 시인이자 서예가이며 사경전문가로 노동부 전통사경기능전승자로 선정(2010-5호) 되었다. 사경(寫經)은 불교(종교) 경전의 내용을 금·은·묵 등으로 옮겨 쓰는 행위, 또는 그 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유서깊은 수행법이기도 하다. 김회장은 미국·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초대전과 시연회 등을 통해 한국 전통사경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