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미륵신앙은 세상이 혼란하거나 불안할 때 융성했다. 후삼국 시대가 그렇고 고려 말과 조선의 임진·정유재란 후가 그러했다. 구한말 역시 마찬가지다. 대개 왕조의 황혼 무렵이었다.
또 패배와 차별의 상처가 깊었던 호남 서부지역에서 더 열렬히 믿어졌다. 그것은 미륵신앙의 현실 변혁적 또는 메시아적 성격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미륵(彌勒·Maitreya)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에 이어 나타나게 될 미래의 부처다. 초기 불교에서 미륵은 석가의 실제 제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미륵은 스승인 석가에 앞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석가는 그런 미륵이, 자신 이후에 첫번째로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불경에 따르면 현재 미륵은 도솔천에서 수행 중이다. 여기서 도솔천은 부족함이 없는 지족천(知足天)을 일컫는다. 석가가 보살일 때 머물렀으며, 미륵은 석가의 설법을 듣지 못한 하늘나라 사람(天衆)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륵은 석가 입멸(入滅) 후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하늘에서 내려 와 중생을 구제하게 된다.
이 미륵신앙은 상생과 하생신앙으로 나누어진다. 상생신앙은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반면 하생신앙은 미륵이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미래에 지상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상생신앙은 쇠퇴했고 하생신앙만 면면히 이어져 왔다.
미륵신앙은 난세일수록 번성했다. 어려움에 처한 민중들이 미륵의 도래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백제는 무왕때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아래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였다"하여 동양 최대의 가람 미륵사를 창건했다. 그러다 견훤의 후백제 멸망이후 이 지역 민중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더 왕성해졌다. 이후 모악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고려 중기에도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미륵의 출현을 고대했고 무속과 결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여립·허균 등이 이 지역에서 변혁을 꿈꾸었고, 말엽에는 동학혁명의 불길로 분출되었다. 또 일제 수탈기를 겪으며 증산교와 원불교로 발전하였다.
어찌 보면 한국의 미륵신앙은 억압과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꽃같은 역설적 신앙이었다. 익산 미륵산의 훼손 소식을 들으며 드는 생각이다.
/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