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⑤전북시단의 개척자 유엽(2)

무정부주의·불교운동 등 앞장…국회의원 출마, 정치에도 관심

난해한 불경 '대승기신로소' 를 풀어쓴 해설서 '멋으로 가는 길' (desk@jjan.kr)

유엽은 생전에 자가본 시집 「임께서 나를 부르시니」(1931), 장편소설 「꿈은 아니언만」(고려사, 1939; 덕흥서림, 1953), 수필집 「화봉섬어」(국제신보사출판부, 1962) 등을 남겼다. 이 중에서 시집의 원본과 소설집의 초판본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문학 부문 외에도 유엽은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 불교와 관련된 그의 공은 놀라울 만큼 크고 넓다. 그는 동경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한용운 스님이 주재한 잡지 「유심」의 발간을 도왔다. 그 후에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 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불가에서는 효봉, 화봉, 금봉 큰스님을 일컬어 '석두하삼봉'이라고 칭하거니와, 그의 사리가 송광사에 모셔진 것도 사형제간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엽은 식민지 시대에는 불교 청년운동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에는 불교계의 정화운동에 솔선하였다. 그는 1974년 대한불교봉사활동본부장을 맡아 사회활동에 모범이었고, 특히 불교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학승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멋으로 가는 길」(삼보인쇄사, 1971; 보림사, 1983)은 난해한 불경 「대승기신론소」를 주해한 것으로 선을 멋에 빗대어 쉽게 풀어쓴 해설서이다.

 

일찍이 「금성」을 발행하여 잡지 발간을 경험한 유엽은 해방 후에 '민족문화'를 만들었다. 이 잡지는 여태 원본을 찾을 수 없으나, 문학과 사회에 관련된 당대 명망가들의 글을 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서울신문 논설위원 겸 주필, 대구의 영남일보 주필 겸 부사장, 부산의 국제신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유엽은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일제 말기에 전진한 하기락 등과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 이력을 바탕으로 그는 해방 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적 결사체였던 독립노동당의 외무위원장을 맡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전주 제1선거구에서 낙선하였다.

 

유엽은 교육자로도 활약하여 해인대학(현 경남대) 학장 서리와 마산대학 이사장 겸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생활고를 겪고 있던 시인 황석우 등을 교수로 초빙하여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여러 부문에서 활발히 활동한 유엽이지만, 한국문학사나 전북문학사에서 정당하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가 일제 말기에 산사로 들어가고, 해방 후에는 작품 발표를 멀리한 탓이 크다.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은 해방 정국에서 유효하게 사용되는 대신에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훼방한 것이다.

 

그밖에도 유엽의 집안은 전라북도의 사회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의 누나 유보경은 교직에 종사하며 「개벽」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녀는 식민지시대에 애국부인회와 전주여자청년회 등을 지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 유춘경은 고산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이끌어 신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개명한 가문의 자손들이 사회적 책무를 다한 모범 사례로 칭송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