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체육 비사] (21)야구인 김성한

프로야구 태동, 전성기 이끈 '홈런왕'

프로야구 30년 역사를 되돌아볼때 김성한(53) 전 감독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1982년 프로야구 창단과 동시에 해태에 몸담은 이래 선수 14년, 코치 5년, 프로감독 4년, 군산상고 감독 1년, 국가대표 수석코치, KBO경기 운영위원및 MBC Espn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프로 선수로 활동하면서 페넌트레이스 MVP 2번, 올스타전 MVP 1번 등을 차지한 것만 봐도 그가 국내 야구에서 남긴 족적을 짐작케 한다.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에서 정통중화요리집 '하이난'을 경영하면서도 영원한 야구인으로 남고 심고, 기회가 되면 언제든 프로야구 감독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김성한.

 

7일 그가 아내와 함께 경영한다는 음식점 하이난에서 만나 야구인생을 들어봤다.

 

김성한은 군산 중앙초 4학년때 야구를 시작, 군산중, 군산상고, 동국대를 거치는 동안 아마추어로도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고, 프로에 가서는 절정의 기량을 꽃피운 대스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릴때부터 굴곡으로 점철됐다.

 

김성한이 6살때의 일이다.

 

그의 부모님은 군산시 '농방골목'에서 '신진옥'이란 음식점을 경영했기에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어른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어느 이른 새벽, 그는 축구공을 가지고 부엌에서 혼자 놀다 곰탕 가마솥을 건드렸다.

 

저녁내 설설 끊은 가마솥 국물은 넘어진 그의 등판을 덮쳤다.

 

얼굴만 빼놓고 뒷목부터 등판, 엉덩이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그는 병원을 전전하면서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는 "화상으로 근육이 뭉치면 운동을 할 수 없는데, 야구를 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게 참 신기하죠"라고 반문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픔을 겪었으나 소년 김성한은 운동도 잘하고 명랑했다.

 

군산중앙초 4학년때 유니폼 입은 모습이 멎졌고, 운동화를 사준다기에 군말없이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군산남중에 들어갔다가 야구하는 친구들이 많은 군산중으로 전학했다.

 

하지만 중학 시절에도 시련이 다가왔다.

 

중 1때 어머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그 후유증으로 병환에 시달리던 아버님은 중 3때는 끝내 이승을 하직했다.

 

3남3녀중 5째인 그는 졸지에 할머니, 여동생과 단 세명이서 어렵게 생활해야만 했다.

 

군산중 2학년때 그는 오랜 방황을 했다.

 

야구를 게을리한 것은 물론, 학교를 빠지는 것도 밥먹듯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가 하면,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며 탈선을 거듭했다.

 

이때 인생의 스승을 만난다.

 

고인이 된 군산중학교 당시 이준원 교감이 바로 그였다.

 

"꿈이 있는 놈이 무슨짓이냐"며 "학적부도 살아있으니 다시 시작하라"며 크게 꾸짖었다.

 

그리곤 방황하던 김성한을 그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숙식을 함께했다.

 

교복 단추를 2∼3개씩은 열고 다니던 불량학생에서 하루아침에 그는 모범생으로 변해갔고 운동에 목숨을 걸다시피하며 희망을 찾았다.

 

군산중 3학년때 그의 팀은 전북에서 최강자로 떠올랐다.

 

때마침 1972년 황금사지기 대회에서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송상복 등이 주축이 된 군산상고 선수들이 역전의 명수란 별명을 얻으며 야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75년 군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1학년때 클린업 트리오인 5번타자겸 3루수였다.

 

기량이 출중해 주전선수가 됐으나 선배들의 시샘으로 엄청 맞아야만 했다.

 

3학년만 12명이나 됐는데 1학년이 주전이 됐으니 선배들이 배가 아플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얼마전 그 당시 썼던 일기장을 보니까 1학년때만 무려 250방 가량 맞았더라고요."

 

김성한의 회고담이다.

 

선배들에게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맞는 걸 '한방'이라고 하는데 제아무리 힘센 사람도 한, 두방이면 끝난다고 한다.

 

선배들의 시기를 이겨내면서 이를 악물고 훈련하면서 그는 전국무대를 휩쓸게 된다.

 

투수 김용남, 포수 신주현 등이 당시 주전 선수였다.

 

전국 대회에 나가면 대구상고 김시진·이만수, 경남고 최동원과 결승이나 준결승에서 만나 자웅을 겨뤘다.

 

고교 시절 최관수(고인) 감독으로부터 "선수가 되기전에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은게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개인적으론 연세대나 고려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동료들과 함께 진학하기 위해 김성한은 동국대를 택했다.

 

그가 6명의 친구들과 함께 동국대에 입학하면서 동국대는 결승까지 진출하는 팀으로 바뀐다.

 

동대문 구장에서 열린 고려대와 결승전때 학기말고사를 연기까지 하면서 전교생이 응원한 일도 있었다.

 

대학 졸업후 1981년 한일은행에 입단하면서 그는 평생의 꿈이었던 '은행지점장'도 할 수 있겠다는 흐뭇한 장래를 그려봤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프로야구가 태동했고 그는 해태에 입단, 3번 타자겸 투수, 그리고 3루수로 공수에 걸쳐 두루 활약한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묻자 그는 1991년 처음으로 한일 프로야구 교류전이 열렸을때, 도쿄돔에서 홈런을 날렸을때라고 말했다.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한국 프로야구를 깔보던 풍토를 한방에 날린 그의 홈런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교포들의 모습을 발견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