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 그림이 뭉클한 편지를 받고

조윤수

유목생활 열흘 만에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베란다의 천리향이 그리운 향기를 내뿜는 가운데 춘란의 꽃대도 수북이 올라와 있었다. 우편물 중에 강원도의 눈사태를 헤치고 온 편지 한 장에도 그림이 담겨 있었다. 그리움을 그리면 그림이고 글이 된다던가.

 

"책을 읽으면서 성님의 웃는 얼굴이 내내 어른거립디다. 걸릴 것 없이 터트려지는, 꽃순 터지는 소리가 들릴법한 맑고 투명한 그 웃음 말이요. 어여쁘신 언니이! 남은 햇살 받으며 그 많은 생명활동, 그 눈부신 도약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육체를 벗으면 인연의 시간이 멎어질 텐데요. 양분이 넘치고 일상의 편리가 자유로운 성님께서, 혹은 차보다 발이 더 빠르다고 했던 제가 잠시 여행을 나서볼까 하는 그리움이 뭉클 이 새벽의 여명을 눈물 나게 합니다." 우리에게 인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깨우고 있다.

 

여행 차비를 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서울에서 볼 일과 만날 사람들이 떠올려졌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련하게 보일 듯한 먼 행로까지 생각해봤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도 그렇게 계획하고 볼 일 등을 기대하면서 떠날 수 있을까. 그 때는 꾸려야 할 짐이 없어 참 편하겠다. 마음도 무거우면 육체를 벗기가 힘들 것이려니. 삶의 여행을 잘 하는 일이 그 긴 여행을 하기 위한 짐 꾸리기가 될 것이다.

 

서울에서 볼 일을 다 마치고, 우리 자매는 성묘도 할 겸 형부의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출발했다. 올라오면서 완주에 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함양을 거쳐 거창에서 볼 일을 다 보니 오후 3시 반이었다. 하루 종일 길 구경이었다. 마침 새로 건설 중이던 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마치 천상의 길인 듯 슬치 고개를 넘는데 일곱 개의 터널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순창 민속마을까지 들렀다가 상관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상관 톨케이트가 우리 아파트 근처에 생겼기 때문이다. 산도 강도 길도 막힘이 없으니 중간에서 숙박할 필요도 없었다.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는 무변의 하늘에도 이렇듯 영혼의 길이 있을까. 세월의 한계나 속도를 느낄 수가 있기나 할까. 어제 내린 춘설처럼 하늘을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다닐 수 있게 될까.

 

육체를 벗을 때 영혼의 옷이 있다면 고려의 수월관음도처럼 연꽃이 수놓인 투명한 사라를 입고 눈송이처럼 하늘을 유영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하늘 수행 끝에 연화로 피고 연실을 맺어 한 천 년 푹 자다가 연화장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연상을 해본다.

 

할 일이 남은 내 캠프로 돌아왔으니 일상이 바쁘다. 사람은 세상 떠날 때를 알게 된다는데, 아직 많이 남은 것도 같지만 나이대로 느끼는 시간이라면 하루가 여삼추다. 인연의 시간이 멎어지기 전에 가슴 뭉클한 편지를 보내온 님을 만나야 할 일. 태어나는 새봄을 맞을 일. 천리향의 그림에 어찌 생의 기쁨이 솟구치지 않으랴! 먼 여행도 때가 오면 겨울을 건너듯이 그렇게 건너면 될 것임에 이 봄을 충만하게 맞을 일이다.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 비평> 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바람의 커튼」,「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