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한국은 폭압과 혼돈의 시대였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이 배태시킨 암울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에워쌌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북은행은 성장을 거듭하며 도약의 토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전북은행은 1980년대를 계기로 전국 제일의 향토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전북은행은 1981년 7월 지방은행 가운데 부산은행과 대구은행에 이어 세번째로 전산개발팀을 신설했다. 은형 대형화의 기반을 다지고 대고객서비스와 업무전산화를 조속히 추진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전산개발팀은 불과 발족 2개월만에 급여업무 전산화개발을 완료했고, 다음 해 1월에는 '업무개발계획, 전산전문요원 양성 및 확보, 1985년까지 전 점포 온라인 실시, 전용터미널 설치, 전직원에 대한 전산기초요원 교육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전산업무 종합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부실채권의 정리 및 사후관리를 위해 관리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같은 해에는 9월 예그린주택 관련여신의 부실화로 인해 한독맥주㈜와 율산실업㈜에 이어 세번째 시련을 맞게 됐고, 이로 인해 이예철 은행장이 퇴임수순을 밟았다.
뒤이어 선임된 배민홍 은행장은 '인화단결·연수강화·선창선도(신뢰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조직의 내실을 다지는 등 '진정한 도민은행'을 지향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 같은 해 4월에는 경원동의 본점 청사에 대한 대대적인 증축공사가 진행됐다. 7개월만에 마무리된 증축공사를 통해 당시 4층 규모였던 경원동 본점을 7층으로 높이는 등 전주의 랜드마크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같은 해 4월에는 전북은행 최초로 남부지점(현 남문지점)과 북부지점(현 태평동지점)에 야간금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5월에는 꿀벌을 형상화한 전북은행의 심벌마크를 제정했고, 경영합리화와 이미지쇄신을 위해 CIP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1982년 2월에는 예수금 800억원을 달성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6개월만인 8월 30일에는 예금규모 1000억원을 달성하는 성과를 이뤘다. 같은 해 10월에는 금융정책당국의 지침에 따라 전일상호신용금고를 제한경쟁입찰로 매각했다.
1983년 12월에는 부안읍에 부안지점 신설을 계기로 도내 전지역 점포망 구축작업을 마무리지었다.
1984년에는 은행사상 최초로 전북은행 행보를 격월간으로 발간, 전북은행소식 및 금융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같은 해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제5대 송주인 은행장을 선임했고, 송 은행장은 '서로 돕고 위하자, 아끼고 늘려가자, 자기계발에 힘쓰자'는 경영지침을 밝히며 사세 확장에 주력했다.
전북은행은 전산업무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면서 1985년 1월 전산실을 독립·승격시켰고, 7월에는 전산실을 전산부로 승격시켰다. 이처럼 은행업무의 전산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86년 1월에 정기적금을, 2월에는 자유저축예금, 4월 가계금전신탁, 5월 가계우대정기적금, 6월 가계종합예금, 10월 별단예금을 순차적으로 온라인화했다. 1987년에도 1월 정기예금을 시작으로, 3월 내국환, 4월 당좌예금, 8월 목돈마련저축과 적립식목적신탁, 11월 여신정보 등을 온라인화했다.
1985년 12월에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해 비자카드 업무를 도입했다.
1986년 7월에는 일신상의 이유로 중도퇴진한 송주인 은행장의 후임으로 고광직 은행장이 선출됐다. 특히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중장기 경영계획을 수립한 전북은행은 첫해인 1987년의 목표를 '적극적인 영업신장, 자산의 효율적인 운용, 경영의 내실화, 직원의 능력개발'로 설정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의 경우 6월 민주화투쟁, 8월 극심한 노사분규, 9월 유망중소기업인 천마화학㈜ 도산 등에도 불구하고 총수신 3000억원을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같은 해 2월 도내 유망중소기업 및 중견수출기업들과 협의회를 구성한 데 이어, 12월에는 전북지역 경제에 관한 각종 통계자료를 수집편집하기 위해 전북지역 경제조사지인 '전은조사'를 창간해 지역경제를 선도하는 중추적인 금융기관의 면모를 재확인시켰다.
한편 전북은행에게 1989년은 각별한 한 해였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성년으로 발돋움한 전북은행은 '1989년은 전북은행 약진의 해'로 선언하고 외형과 내실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주력했다.
1980년대 말은 금암동시대를 열기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1989년 11월 본점신축을 위한 본점건축본부를 신설한 데 이어 한달여 뒤인 12월 28일에는 금암동 본점 착공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