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칼럼] 이태석 신부와 켈러 원장

권창영 (전주 예수병원장)

 

오월은 푸르고 꽃향기는 바람에 실려 온다. 이 빛나는 계절에 깊은 호흡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상쾌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는 하얀 아카시아 향처럼 그렇게 살았던 이들을 만나 보자.

 

여기에 두 명의 영웅이 있다. 한명은 영화 '울지마 톤즈'로 잘 알려진 이태석 신부고 또 한명은 예수병원 묘역에 묻혀있는 의사 켈러다. 이 두 사람은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시공을 초월해서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푸른 오월로 살아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밴드가 행진하고 있다.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고 그는 환하게 웃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용맹함의 상징인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이태석 신부.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그는 2001년부터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봉사를 하다가 지난해 암으로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또 한 명은 조용한 영웅으로 불렸다. 1955년, 대한민국 전주, 예수병원 설대위 박사가 결핵에 걸려 의사가 필요하자 소아과 의사 켈러(Dr. Frank Keller)가 예수병원에 지원했다. 그는 땅딸막하고 머리가 회색인 40대 남자로 항상 미소 띤 얼굴에 유머 감각이 풍부했다. 켈러는 미국 알라바마 모빌에서 잘 운영되던 소아과 의원과 장비, 자동차를 모두 팔고 배로 태평양을 건너 전주 예수병원에 와서 소아과와 내과를 맡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은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굶주림, 추위, 폭발물 사고, 전염병과 기생충이 만연했고 1955년과 다음 해에 큰 흉년이 들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예수병원은 버려진 아이 50명을 데려다 돌보고 유엔 한국재건기구의 도움을 받아 전염병 병동을 세웠다. 그는 초등학교 공립화 정책에 따라 문을 닫는 초등학교 부지에 예수병원을 이전할 수 있도록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예수병원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는 꾸밈없이 소박했고 자제력이 있었으며 성실, 간결이 그의 신조였다. 하지만 그의 엄격한 생활양식도 아이들 앞에서 한없이 유연해졌다. 어린이들을 풍성한 깊이로 사랑한 그는 부드러운 손길과 열린 마음으로 살았다. 켈러 원장이 한국에서 헌신한 세월은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1957년에 대뇌혈류 장애로 고통을 받았던 그는 1959년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갔을 때 대뇌혈전증이 발병했다. 그는 이 마지막 경고마저 무시하고 가난한 전주로 다시 돌아왔고 1967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태석 신부와 켈러 의사가 죽음이 한 발짝씩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도 떠날 수 없었던 내전과 가난과 병마로 인간의 존엄성이 상처받은 곳. 톤즈와 당시의 전주. 지금도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극도의 빈곤으로 신음하는 아시아 지역에는 6명 중 1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사소한 것은 참지 못하지만 이웃에게는 무관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우리들은 이 영웅들 앞에서 영혼의 떨림을 느낀다. 그들의 묵묵한 헌신과 겸손, 확고함과 꿈은 오늘 우리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이다.

 

이해인 시인은 많이 사랑한 그들 앞에 조금 사랑한 우리는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당신은 웃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만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네요/ 사랑에 대해서 말만 무성한 이 시대/ 진정 아낌없는 헌신으로 사랑에 목숨 바친 당신을….'

 

/ 권창영 (전주 예수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