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엽 육상 전임지도자(54)는 학창 시절 원반던지기 선수를 거쳐 익산에서만 만 30년 동안 투척을 가르쳐온 사람이다.
체육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 체육상 최우수지도자상'을 비롯, 전북체육상을 무려 6번이나 받았다.
국제와이즈맨이 수여하는 체육봉사 대상을 받은 그는 지도자 생활 30년 동안 제자들이 무려 1500개의 금·은·동메달을 따낸 경이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투척에 관한 한 전북은 물론, 전국 최고의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체육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북 육상의 저력을 널리 떨친 이주형·송금숙·오미자·범정자·조례림·이혜림·전대성·이미나·이금희 등을 찾아내 대선수로 길러낸 사람이 바로 최진엽이다.
그는 현재 익산지역 초중고 선수들에게 원반·포환·창·해머 던지기를 가르치고 있다.
군산시 서수에서 태어난 그는 대성중, 이리공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때 그는 체육교사(양재욱)의 눈에 띄어 축구선수겸 원반던지기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일동 통일당 총재의 조카인 양재욱 교사는 운동신경이 좋은 최진엽을 발굴했다.
전북 대표로 뽑힌 최진엽은 전주 종합경기장에서 단 2주동안 투척 전문가인 이혜자(고인)의 지도를 받고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가 원반던지기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일약 대성중학교에서 영웅이 됐고, 한동안 임피 일대에선 이 소식이 화제였다.
그의 집안이 쟁쟁했기에 유명세가 더 컸다.
아버님이 공무원을 지냈고, 가까운 집안 친·인척중에 도지사, 국회의원, 교장, 경찰서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로 했으나, 그의 운명은 축구 선수가 아니었다.
전라고로 진학하자마자 축구팀이 해체되더니, 전주고로 옮기자 또 축구팀이 해체됐다.
마지막으로 원광고로 옮겨 축구를 하려고 했으나, 공교롭게 원광고도 축구팀이 해체돼 버렸다.
낙담한 그는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이듬해 이리공고로 진학했다.
운동은 아예 포기한 채 기계과에서 판금, 주물, 선반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리공고 김종주 체육교사는 그를 원반던지기 선수로 인도했다.
고교 2학년때 대구에서 열린 제56회 전국체전(1975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각종 대회에서 10위권 안팎의 실력에 불과한 그가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전국체전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강자는 강릉농고 김태영으로 전국에 그의 경쟁자는 아무도 없었다.
원반던지기에서 48m 기록을 가진 그는 최진엽보다 무려 5m이상 앞서는 발군의 실력을 갖춘 선수였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다.
체전을 일주일 가량 앞둔 어느날 최진엽은 훈련을 마치고 운동장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면서 "서너번만 더 던져보고 집에가자"며 힘을 빼고 가볍게 원반을 뿌렸다.
평소 43m밖에 나가지 않는 실력이었는데 힘을 쏙 빼고 하니 47m이상 나가더란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는 다음날 또다시 연습을 해보니 최고 50m까지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힘을 빼면 뺄수록 멀리 나간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대구에 간 그는 51m46cm의 대회신을 세우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최진엽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홀로 경기를 한 그는 메달도 받지 않고 숙소로 돌아와버려 경기장에선 그를 찾느라 난리가 났다.
밤 늦은 시간, 도내 체육인들이 그를 찾아왔고, 체육기자들은 최진엽을 수배하느라 난리였다.
고교 졸업때까지 절정의 기량을 발휘한 그는 전북대에 진학하면서 서서히 전국무대 정상권에서 멀어져 갔다.
대학 졸업직전 그는 고교시절 은사였던 김종주 익산교육청 장학사와 다시 만나면서 운명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코치가 된지 1년도 되지 않아 이리여중(현 지원중)의 송금숙, 오미자, 범정자가 소년체전서 나란히 3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그는 지도자로서도 역량을 인정받는다.
만 30년동안 소년체전이나 전국체전에서 노메달에 그친 것은 단 두번밖에 없었다.
동암고 김진태 교감과 얽힌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시절 체육을 전공했던 김진태 교감은 전주시내 인문계 고교, 그것도 신설학교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육상을 지도했다.
최점동·김호진·양종구 등의 제자를 육상선수로 키워낸 것이다.
전문지도자를 찾던 김진태 교감은 최진엽과 제자들을 연결해줬다.
최진엽은 틈나는대로 전주종합경기장에서 이들과 훈련을 함께하며 노하우를 전수했다.
김진태 교감은 "술과 담배를 일체하지 않으면서 열정적으로 선수를 지도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대다수 지도자들은 선수가 잘하면 예뻐하고, 못하면 미워하지만 최진엽은 편견을 떨쳐내고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통한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최 씨는 선수들보다 먼저 운동장에 나가고, 결손가정 선수를 더 따뜻하게 대하고,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에겐 가슴아픈 부분이 있다.
정식 교사가 아닌 코치로 활동해왔기에 쥐꼬리만한 월급봉투를 내밀때마다 손일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던 아내가 지난해 암으로 쓰러졌을때 "가장 노릇을 잘못해 그런게 아닌가"하며 자책도 많이 했다고 한다.
"손에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지도한 선수들중 메달을 못따 대학 진학을 하지못한 제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그의 말엔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