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잘못 들어 고생 꽤나 했다. 시골길이니 금세 찾을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이 얼마나 당치않았는지는 자동차 겨우 한 대 지날 수 있는 산길을 서툰 운전솜씨로 되돌아 나오면서 절감했다. 세 차례의 통화 끝에 간신히 제 길 찾아 올라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좋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 그 곳, 낮게 내려 지은 작은 집들이 선하게 모여 있는 마을 입구에 이남곡 좋은 마을 대표(66)가 나와 있었다.
"20세기의 진보가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21세기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과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은 그 주체와 동력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진보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느릿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법. 마치 좋은 강연을 듣는 것 같았던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깝게 이어졌지만, 들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마을이 참 좋습니다. 녹음이 아름다워서 눈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나이 예순에 처음 와본 곳 이예요. 장수는 60년 살면서 지나본 적도 없었는데 묘한 인연이지요. 집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2004년인데, 그때는 우리 집 달랑 하나만 있었어요."
-지금은 이웃들이 있던데요.
"네 집이 우리 인연 따라 들어왔어요. 여기서 결혼한 부부 덕분에 네 살짜리 아이도 있고, 바로 윗집에는 초중학생도 있어요.'마을에 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일이죠."
-어쩌다 장수 이 산골까지 오셨습니까.
"2003년에 수원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8년 공동체 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집사람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고립감이 있고 소통이 안 되니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작고 독립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죠. 강원도 횡성부터 전남 해남까지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여기입니다.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좋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공동체 생활은 무소유와 무아집이 중요한데, 관념은 있지만 체화 안 된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예요. 부자유, 허위의식 이런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곳이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산력' '좋은 욕구' '좋은 소비', 이런 것들이죠."
-경험도 없으셨을텐데 곧 바로 회사를 차리셨더군요.
"처음에 항아리 열 댓개 들여놓고 장류사업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취미 생활 하는 줄 알더군요. 그 뒤 생협과 관계하다 보니, 차츰 커져서 지금은 큰 항아리만 300개 쯤 됩니다. 이제는 제법 꼴을 갖춘 사업장이 되었어요."
-요즈음 강의 때문에 바쁘실텐데 사업은 누가 합니까.
"사장은 집사람, 나는 종업원. 또 직원 한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작년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고 참 어려웠어요. 큰 아들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와 사업을 맡으면서 나는 자진 퇴사했어요."
-논어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논어' 강의 활동으로 바쁘신데 언제부터 논어를 공부하셨습니까.
"논어도 예순이 넘어서 만났어요.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으로 보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시절엔 논어에 대해 반감이 깊었지요. 공자도 그렇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떤 견고한 틀의 상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와서 사람들하고 소통하다보니 자꾸 얽혀요. 이해관계도 그렇고, 대화의 방식도 그렇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분이라도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좀 해보자 했어요. 그때는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니까 장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왔죠. 공동체 생활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죠. 새로 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 심층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것 같다고 어설프게 같이 했다가는 크게 후회 하는 경우가 많죠. 심층의 의식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연습의 장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논어를 선택했죠. 2년 동안 매주 했어요."
-논어 읽기의 성과는 있었습니까.
"논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성현이고. 우리는 논어 읽기를 '연찬'이란 말로 씁니다. '연찬'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는 형식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연찬'은 무엇입니까.
"연찬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가라든지,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를 끝까지 함께(선생은 '함께'를 강조했다) 탐구하는 과정이지요. 가장 중요한 연찬 태도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 참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맞아요. '잘 듣는 것' 쉽지 않지요. 공자는 이순이라 해서 60에 이르러서야 얻었다고 했어요.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통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안들리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저것을 반박할까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거든요."
-논어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논어에서 만난 공자는 무아집의 사람이더군요. 배울수록 완고해지지 않는. 이를테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관성인데,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것은 유연함이지요. 아집이 없어서 오는 유연함이 중요해요. 유연한 일관성은 바로 현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이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일치해요."
-요즈음 높아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 전체 과정을 혁명으로 봅니다. 실제로 신생독립국가 운동에서 한국만큼 민주화와 산업화, 이 두가지를 반세기에 성공시킨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민주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어찌됐든 적어도 절대 빈곤과 독재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오히려 다른 요소들이 있죠. 빈부 양극화나, 환경 파괴 같은···.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이것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성찰이 인문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문학은 잘못하면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차원이어야 하고, 그 중심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해요."
-그것이 선생님께서 최근에 주창하시는 신인문 운동인가요.
"예전 문예부흥은 중세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분수령이 된 사상문화운동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의식이 중시 되지 않는 운동은 다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다 실패했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 과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환경문제, 빈부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이제는 제도와 물질만으로 안 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생활과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것을 신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국 공동체여야 된다는 뜻인가요.
"'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동안 너무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지나친 행위능력이 발휘되고 그렇다보니 전쟁이나 환경파괴, 빈부 양극화 같은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겼죠. 그것을 해결하려면 생활혁명운동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 소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랄까요."
-단순 소박한 삶을 말씀 하셨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지향이 그것 아닐까요.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단순 소박한 삶은 도시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시골에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고 온 사람들 중에는 누가 더 생태적인가 서로를 비교하며 비난하기도 해요. 이것은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아니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의식을 없애야 합니다. 형태적으로 소박한 삶이란 욕구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옵니다. 정신적 욕구가 커지다보면 물질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죠.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녜요."
-귀농한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뜻을 품고 농촌에 온 사람일수록 실패하는 예가 많아요. 큰 꿈을 갖고 왔는데 그것이 실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꿈이었을 때는 백번 실패합니다. 내가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을 때 그것을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실태를 강조했더니 자기는 실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태,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지니까. 놀랄 일이죠.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하니. 그런 꿈은 이상도 아닌 환상일 뿐이에요."
-선생님의 귀농은 성공하신 겁니까.
"내 경우는 귀농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들어간 것인데 만족했어요. 나는 사실 도시 생활도 부정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차별심을 두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 때문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6개월만 살아보세요. 별것 아녜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에요. 특히 부부가 뜻을 같이해 세운 삶이라면 그야말로 확실한 로망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남진이 이미 불렀잖아요.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웃음) 그런 로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사이좋으면 이웃과도 좋아지고 마을이 화평해져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소유적 삶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도 있지만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법고시 예비시험도 보았어요. 그런데 현실을 보니 내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살 때가 아니더군요."
-결국은 남민전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셨지요.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3개월 활동했습니다. 주체적이거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그런데 1년 있다가 사건이 터져서 15년 구형을 받았지요. 그동안 실사구시 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내 삶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5년 선고에 4년 살고 1년은 특사로 풀려났어요."
-그 안에서 무슨 변화를 겪으셨습니까.
"그 전부터 내 사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었는데 그 안에 있으면서 심화되었어요. 제도만을 변화시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 혁명에서 개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벽은 총체적 변화지요.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까지 바뀌어야 하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의 대긍정'을 말씀하시던데요.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태도 중의 하나가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예요. 나는 이것을 매우 위험하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대긍정'은 이루어진 현실 전체를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나가보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고 하지요. 신자유주의 반대를 열심히 외치던 사람들이 생활에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초자유주의예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죠. 사실 우리가 경쟁의 폐단을 이야기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진보가 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해요. 그것은 결국 실사구시에 대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적 진보와 인간 자체의 진보를 이뤄야 해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십시오.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젊은 세대들의 진정한 호연지기를 오히려 꺾고 있어요. 대학 만해도 어떻습니까. 대학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진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루한 진보의 장이 되고 있지요. 시대는 순환하는 것이니 대학이 다시 창조의 산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어요. 청년들이 그 안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이남곡 대표는...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면서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농촌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사상에 큰 변화를 얻었으며 출옥 이후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연구했다. 이즈음 무아집 무소유로 집약되는 '야마기시' 사상을 만나 1996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무소유 사회보다는 오늘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실천을 하고 싶어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 터를 잡고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논어를 통해 자기 성찰과 소통의 방식을 나누는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논실마을학교(장수군 번암면) 이사장을 맡아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현대적 위기로부터 미래의 밝은 빛을 여는 운동을 의미하는 '신인문 운동'을 주창해 주목 받고 있다. 저서로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으며 〈논어를 연찬하다(가칭)〉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좋은 마을'은 다섯가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면서 이 대표가 만든 장류 생산업체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