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7)해남 대흥사의 현판들

원교·창암·추사의 글씨 한 자리에

(위부터)원교 대흥사 '침계루', 창암 대흥사 '가허루', 추사 대흥사 '무량수각'. (desk@jjan.kr)

枕溪樓(침계루) -시내를 베개 삼아 세워진 누대

 

無量壽閣(무량수각)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시는 불전

 

駕虛樓(가허루) -허공을 타는 누대

 

枕:베개 침/ 溪:시내 계/ 樓:다락 루/ 無:없을 무/ 量:헤아릴 량/ 壽:목숨 수/ 閣:집 각/ 駕:탈 가, 수레 가/ 虛:빌 허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며 달리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원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이곳에 자리하였고 또 서산대사가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3대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 있어서 3대 명필의 서예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枕溪樓, 無量壽閣, 駕虛樓가 바로 그것이다.

 

침계루(枕溪樓)는 글자 그대로 '시냇물을 베개 삼는 누대'라는 뜻이다. 절 주변에 흐르는 시내 위에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대를 앉히거나 시냇가 언덕에 누대를 지었다는 의미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침계루'라고 한 것이다. 대흥사 외에 경북 울주의 석남사에도 침계루라는 이름의 누대가 있고 순천 송광사에도 침계루가 있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인데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염원을 품고 한량이 없는 수명을 이어가며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지금도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는 부처이다. 달리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가허루(駕虛樓)는 불교보다는 도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는 이름이다. 설악산 한계사(寒溪寺)에도 가허루라는 누대가 있는데 한계사 가허루에 대한 기록인〈가허루기(駕虛樓記)〉에는 "표표히 속세를 떠나 날개를 달고 신선의 세계에 오르고자하는 뜻을 품게 된다.(其飄飄如遺世 羽化登仙之志)"는 구절이 있다.

 

이광사가 쓴 침계루 현판은 글자의 모양이 매우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초서이다. 그러나 모양 즉 결자(結字)에 비해 필획은 다소 약한 편이다. 호방한 초서를 너무 점잖은 필획으로 썼다고나 할까? 허우대에 비해 골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이광사 글씨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은 다분히 디자인적이고 현대적이다. 필획도 두툼하여 실팍지고 결구도 중후한 가운데 시원하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글씨인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특히 '閣'자의 '門'부분 문기둥에 해당하는 획의 끝부분을 오른편으로 쭉 삐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추사의 실험정신과 예술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창암이 쓴 가허루 현판은 매우 단정한 해서체이다. 창암은 제자들에게 현판 글씨 쓰는 법을 따로 가르칠 만큼 현판 글씨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필자가 최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창암은 현판글씨만큼은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가독성(可讀性) 즉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 모양으로 쓰는 것'을 매우 중시한 것 같다. 이 가허루 현판은 창암의 이러한 서예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대흥사는 조선 후기에 조선의 지성들이 모여 담론하는 세미나실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절이다. 초의선사와 추사의 교류도 유명하고, 다산 정약용과도 관련이 깊은 절이며,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이광사와도 연관이 있는 절이다. 36세에 요절한 천재 아암 혜장 스님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절이다. 그런데 유독 창암 이삼만과 대흥사와의 관계에 대한 자료는 전하는 게 거의 없다. 창암과 초의가 주고받은 시가 몇 편 있다는데 최근 필자는 창암이 쓴〈남해의 스님 초의와 이별하며(贈別南海僧草衣)〉라는 시 한 수를 접하였다. 창암도 대흥사 세미나실을 자주 드나들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대흥사와 원교, 창암, 추사, 다산, 아암 등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 후기 지성인의 교류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대흥사의 현판에 주목해야 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