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원이 낳은 조선의 여성시인, 김삼의당

문학에 대한 재능·열정 유교 밖 세상을 꿈꾸다

 

1769(영조 45)년 10월 13일 남원 서봉방에서 여류시인이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 여성이 억압받던 시절, 그녀는 규방문학의 대가 허난설헌에 필적할 만한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중국의 여류시인 이청조와 비견되어 조선의 이청조라 불리기도 했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는 당대가 요구한 현모양처였으며 여성평등을 주장한 페미니스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로서 추앙받았으나 개별자로서 불행했을지도 모를 천재시인 김삼의당. 현재 그녀는 우리지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 여성학적, 평등의식의 첨병에 섰던 그녀에게 오늘날 부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물어본다.

 

첫닭이 울기도 전인 어스름한 새벽녘, 삼의당은 정갈한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다. 남편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한양으로의 유학자금을 보태기 위함이다. 형편없게 된 머리를 수건으로 싸맨 뒤 꼭 다문 입술이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느 여염집 아낙과 다를 게 없지만 이것이 몇 번째인가, 그녀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돈다. 10여 년 동안 규방에 홀로 남겨진 세월, 그 설움을 진정이라도 하듯 시 한 수를 적는다. 고음(苦吟)이다. 세도정치의 먹구름이 조선을 덮을 때 입신양명에 뜻을 둔 시골 선비의 반려로 산다는 것 그 통점(痛點)의 기록. 사랑하는 남편의 거듭되는 좌절과 방황은 그녀에게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짐 지운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삼종지도'는 삶의 근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처녀 적부터 담락당과 해로할 때까지 약 200여 편의 작품을 생산했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런데 과연 삼의당 김씨는 유교문화가 요구했던 '표본'으로만 사는데 행복했을까? 영특한 여성으로서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싶지 않았을까?

 

삼의당 김 씨는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1462~1498)의 11대 후손인 김인혁(金因赫)의 딸이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자손으로서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시,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담락당과 혼인을 한다. 담락당은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천재소리를 듣고 자랐다. 담락당 하립의 6대 후손인 하재경 선생(74)은 담락당이 태어난 배경과 그에 얽힌 전설이 실려있는 '신옹유부(神翁遺符)'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다섯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데 그 중에 셋째용이 하립이라는 것.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부부시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삼의당'이라는 아호는 시·서·화가 능하다 하여 부군인 하립이 지어준 것. 그들은 경서며 사기류를 섭렵하였고 평생을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주위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담락당의 거듭되는 낙방소식은 그들 부부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삼의당은 규율과 부도(婦道)를 한평생 지키며 살았다. 그녀는 세간의 평가대로 남편과 부모께 헌신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나날들의 기록이 그녀의 시집인'삼의당김부인유고'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집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100년이 지난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삼의당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같이 삼의당에 대한 연구가 부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역사와 기록마저도 서슴지 않고 왜곡하는 유교사회 사대부들의 뜻깊은 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의 집안은 전라도 변방에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간 벼슬도 없는 집의 아낙이었음에 기인한다. 차제에 조선 후기의 규방시인 삼의당이 지향한 것이 무엇인지, 문학사적 의의를 밝혀야 할 것이다.

 

남원시 서북쪽에 삼국시대의 석축물 교룡산성이 있다. 교룡산의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해발 518미터의 포곡식 산성이다. 유인궤가 축조했으며 왜구의 피난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오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교룡산성 아래로 잘 조성된 공원이 있다. 이곳에 김삼의당의 시비(詩碑)가 세워져있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 두 권이 1930년에 간행되었는데 시 99편과 산문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필사본은 하재경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이화여대 등 학계에서 삼의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최초의 '부부시인'인 이들에 대한 연구는 남원과 진안을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비록 절터만 남았지만 김시습의 소설'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만복사가 있는 점이다. 노총각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일종의 노름)에 이겨 예쁜 처자와 인연을 맺었지만 처자는 사람이 아닌 혼령이었다는 것. 혼령이 떠난 후 양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종생토록 수절(?)을 했다는 이야기다. 허구이긴 하나 축첩제도를 당연시했던 시절에 대한 김시습의 반격이 유쾌하고 통렬하기까지 하다.

 

삼의당 내외는 거듭되는 실패 속에 선영이 있는 진안 마이산 자락으로 이주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마이산엔 '부부지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설화가 있다. 조물주께서 금강산 1만 2천봉을 조성할 요량으로 전국의 산봉우리를 소집했단다. 금강산엘 가기 위해 길을 떠났던 부부 산이 진안에 홀딱 반해 진안에 머물렀는데 이곳을 별유천지로 여겼던 암마이봉이 그만 진안에 눌러앉았다. 세속적 욕망이 강한 숫마이봉은 전국의 명산들과 힘을 겨룰 기회를 놓칠까봐 잔뜩 화가 났다. 남편의 성화에 모두 잠든 새벽녘 느릿느릿 발을 옮기는데 그만 어떤 아낙에게 들켜버려 지금의 모습으로 화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전설이란, 당대 민중의 욕망과 세계관이 스며들어 여러 가지 화소(話素)가 삼투되는 것. 따라서 진안 마이산에 내려오는 전설은 마이산의 선경(仙境)에 대한 진안사람들의 자랑스러움이 반영된 것이다. 또 유교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그들의 부부유별(夫婦有別)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풍자가 아니었나 싶다. 산이 움직인다는 애니미즘적인 상상력이 즐겁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담락당과 삼의당의 유별난 부부애와 그들이 겪었을 삶의 고초가 애잔하기만 하다.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엔 그들이 살았던 생가는 헛간만 남아있고 그마저 다름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 하재경 선생은 후손으로서 생가복원을 위한 지원이 전라북도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단다. 마이산 탑영지(塔影池)에도 담락당과 삼의당의 시비와 명려각(明麗閣)이 세워져 있다. 부부지간의 정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맑고 곱다하여 명려각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이산(馬耳山) 자락의 탑영지(塔影池)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삼의당 부부는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좌절된 욕망을 담보로 얻어낸 평화가 어찌 즐겁기만 했겠는가! 더구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두 딸을 병으로 잃었다 하니 그 참혹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을 추스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삼의당은 마이산 봉우리가 거울처럼 비춘다는 호수 탑영제를 배회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옥같은 시가 한 편 두 편 나왔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날이 맑다. 탑영제 맑은 물속에 마이봉 부부가 잠겨있다. 농사일이 손에 익지 않아 담락당의 손바닥엔 마디마디 옹이가 박혀 있다. 그것을 보는 삼의당 속이 시커멓게 탄다. 간밤에 썼던 한 편의 시를 남편을 위로할 요량으로 담락당에게 건넨다.

 

붉으레한 내 얼굴에 꽃 또한 붉고 붉어

 

두 붉은 게 서로 마주 열심히만 보나니

 

붉고 붉고 더 붉고 붉어지다간

 

내 얼굴이 꽃보다 한결 붉어지겠네

 

키를 낮춰 꽃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꽃이 핀다고, 당신의 욕망이 속절없이 저버린 꽃이라면 내 얼굴에 새롭게 핀 이 붉은 꽃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뜨거운 심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남편에 의해 죽고 사는 조선여성의 일단이 삼의당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

 

현모양처의 대명사였으나 개별자로서 갈등했던 '고뇌의 나날'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그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교 속의 여자'로 살면서도 '유교 밖의 여자를' 꿈꿨던 그녀는 평생 사랑하며 살았던 부군과 함께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잠들어 있다.

 

/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