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8)묵소거사(默笑居士) 자찬(自撰) -추사 김정희의 글씨(5)

'말없이 빙그레 웃는' 修身 의미 담겨 있어

當?而?,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笑居士自讚.

 

응당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 할 수 있고, 응당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상황이 있다.)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조절해야 할 때도 있고, 몸을 굽혀야 할 때와 나래를 활짝 펼 때가 있으며, 뭔가를 없애야 할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북돋아야 할 경우가 있다. 이런 때, 저런 경우마다 때로는 활발히 움직여 활동하면서도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때로는 조용히 멈춰서면서도 인정(人情)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저런 어떤 경우에도 침묵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는 '?笑'처럼 좋은 처신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笑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를 당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에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笑하기에 힘써야겠다. (지금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만 하는) 나의 경우에 빗대어 봄으로써 (묵소하며 산다면 세상의 모든 비방과 환난을) 면하고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當:응당 당/ :잠잠할(침묵할) 묵/ 笑:웃을 소/ 周:두루 주/ 旋:돌(선회) 선/ 屈:굽힐 굴/ 伸:펼 신/ 消:사라질 소/ 際:즈음(때)/ 悖:어긋날 폐/ 拂:털(털어낼) 불/ 矣:어조사의 哉:어조사 재/喩:깨우칠 유/傷:상할 상/ 患:병 환/ 勉:힘쓸 면/惟:오직 유/ 況:빗댈 황/ 免:면할 면/ 讚:기릴 찬

 

오늘 소개한 글은 상당히 길다. 그러나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신다면 큰 재미와 보람을 느끼시리라고 생각한다. 짧은 글이지만 속뜻이 너무 깊어 필자도 번역하는데 적잖이 고심했다. 번역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 작품은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추사 해서(楷書)의 백미이다. 원래는 추사 자신이 짓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라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둘레를 빙 돌아가며 찍힌 도장이 추사의 절친한 친구인 황산(黃山) 김유근(金?根1785~1840)의 것임을 발견함으로써 김유근이 글을 짓고 추사가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는데 후에 김유근의 문집인 《황산유고(黃山遺稿)》에 이 〈묵소거사(?笑居士) 자찬(自讚)〉이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김유근의 글임을 확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김유근이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실어증에 걸려 고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 글을 실어증에 시달리던 그 시기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고 글씨 또한 그 시기 즉 추사의 나이 51세에서 54세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김유근의 이〈묵소거사 자찬〉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質)이 크게 달라짐을 보여주는 명문(名文)이다. 실어증에 걸린 상황에서 침묵하는 가운데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그런 침묵과 웃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려 하는 태도가 얼마나 여유롭고 긍정적인가? "말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해가 될 일이 무엇이겠으며, 중용의 입장을 지키면서 웃음을 보인다면 웃었다고 해서 무슨 환난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말이 없는 가운데 빙그레 웃기에 힘써야겠다."고 하며, 실어증에 걸리고 보니 그런 '?笑'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는 작자 김유근은 이미 삶에 달통한 도인(道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사의 글씨 또한 글만큼이나 명작이다. 추사의 작품 중에 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작품은 유독 해서로 또박또박 쓴 걸 보면 글씨에도 '말없이 빙그레 웃는' 수신(修身)의 의미를 담고자 한 것 같다. 필획에서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았을 때 용쓰는 물고기의 힘과 같은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다.

 

?笑,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편하고 쾌활해야 빙그레 웃을 수 있는데 어디 범인(凡人)들이 그렇게 할 수 있나? 말을 안 하다보면 평안해지기는커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에 빠지고 마는데 어디에서 '빙그레'웃음이 나올 수 있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말없이 웃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