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근대사를 함께 써온 전주화교들
한 때 전주가 화교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꼽혀 중국 화교 문화와의 교차점을 이루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전주화교는 전주 근대문화사에 있어 확고한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의 격동기였던 근대 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나 인식이 부족한 데다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우리문화는 전주화교문화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들고 말았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역사를 수놓는 당당한 씨줄이자 날줄인 전주화교들의 이야기. 중국 화교문화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전동성당, 관성묘, 삼합원을 통해 잊혀지고 있는 전주화교의 문화를 돌아본다.
▲ 화교 1세대에 의해 지어진 전동성당
화교라 함은 '본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국의 문화적, 사회적, 법률적 측면 등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뜻한다. 이들 화교들이 전주에 터를 잡은 것은 한 세기 전으로 추정된다. 그 실마리가 되는 첫 번째 것은 전주의 건축, 토목 현장에 투입된 중국인 목수나 기와공 등 기능공에 대한 이야기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을 마주보고 자리 잡은 천주교 성당인 전동성당.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복합된 이 성당은 호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건축물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다. 1908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완공된 전동성당에는 3년 이상 전주에 거주하며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의 손길이 닿아있다. 이 본당 건물의 기초공사 당시 중국 공장들이 흰색과 붉은 벽돌을 찍어 쌓았다. 5명의 목수와 100명의 석공들이 가마를 설치하고 65만장 이르는 벽돌을 찍었다고 한다.('전동성당 100년사' 중 보르메 신부가 대구교구에 보낸 편지) 당시 이런 벽돌을 찍을 수 있는 기술은 중국인 석공들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초대 주임신부가 중국인 목수에게 공사를 맡겨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전주의 자랑 중 하나인 전동성당이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대아리 저수지 축조에도 이들의 땀이 보태졌음도 확인된다. 1921년께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일대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에 대아리 저수지가 건설된다. 이때 당시 댐 외벽에 석축을 축조하는 공사에도 중국인 공장들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이들이 1910년 전·후 전주 근대사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화상(華商)들과 연계되면서 전주화교의 시초가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 화교들의 정신적 신앙, 관성묘
또 하나,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기슭에 있는 관성묘에서도 전주화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관성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운장, 즉 관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 희랍신화에서 유래하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행운의 여신이 있다면 동양 즉 중국과 한국에는 구체적 재복신(財福神)으로서 관우운장이 숭상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운장은 의리와 신의의 상징이어서 신용을 생명으로 받드는 중국 화교상인들의 정신적 지주이고 중국부기 산법의 발명자라고까지 알려진 관운장에 대한 화교들의 신앙은 각별한 데가 있다.
"평소에 명절 때도 거의 다 오고…. 뭐가 잘 안 풀릴 때 기도를 올리지요. 마음이 좀 편하고…. 전주 화교가 한 천명 정도 있었어요. 장구치고 북치고… 시내에서 모여가지고 여기까지 옵니다. 재를 올리는 거죠." (전주 진미반점 운영하는 유영백씨의 인터뷰)
우리나라의 관성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에 의해 유입되어 성하였다. 당시 전주 외곽에도 비교적 큰 규모의 관성묘가 지어졌다고 하며,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5년 전라도 관찰사인 김성근과 전주 외곽의 남고산성 무관인 이신문이 각 지역 유지들의 헌납성금을 받아 다시 복원한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 관성묘는 조선조 말기의 화가 소정산의 '삼국연의도'의 10폭이 관우묘에 보존되어 있는,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곳으로 초기부터 화교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이곳에도 여느 관성묘처럼 중앙에 위령현혁(威靈顯赫), 좌측에는 문무성신(文武聖神) 우측에는 간체자 위령현혁 현판이 걸려있다. 중앙의 위령현혁은 중화민국 10년 '산동동향회'가 기증한 것이다. 왼쪽의 문무성신 현판은 1930년대 전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상 중 하나였던 화교 거상 '의화길'이 기증했다. 오른쪽의 마지막 현판은 1966년 당시 전주화교소학교 교장이며 진미반점을 운영하던 임국량씨가 기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관우에 대한 숭배는 여러 민간신앙 중 특히 철저했고, 중국 상인들이 더욱 그러하였으며, 전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 이곳에는 관운장과 제갈공명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지금도 1년에 여러 차례 정기적인 의식을 치르는 데 멀리 인천에서도 연로한 화교들이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낯선 나라, 낯선 고장에서 관성묘는 화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관성묘가 화교들만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성묘는 우리의 도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담긴 사연들은 우리 땅, 우리 이야기인 것이다.
▲ 지역의 유일한 근대문화유산 지정된 삼합원(三合園)
다가동 차이나타운 신흥상회 옆에 위치한 전주 삼합원. 이곳 역시 전동성당을 건축한 중국인 벽돌공들의 손길이 닿은 곳으로 중국 근대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삼합원은 중국의 전통적인 주거공간인 사합원이 변형된 행태로, 본래의 사합원은 사각형 모양의 지붕의 각 변이 맞닿아 있는 미음('ㅁ')자 모양으로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본채와 사랑채 등 4개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 중 사랑채 역할을 하는 문방이 없거나 동쪽과 서쪽의 건물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삼합원이라고 불리는데, 전주 차이나타운에 있는 것이 바로 이 형태를 띠고 있다. 전주 삼합원은 대대로 포목점을 운영했던 왕국민씨(72·현 신흥상회 운영)의 소유로 1920년대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점의 모습을 본 뜬 것이다. 특히 삼합원은 우리 지역의 중국식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역사적 가치도 높지만 화교들의 생활사와 일상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 화교들의 고향, 전주 차이나타운
전주는 화교들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6·25 전쟁기간에도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농업중심지로 경제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기후와 이에 따른 온후한 민심 역시 화교들의 전주 유입을 촉진시켰다. 유입된 화교 수에 비해 아이들이 적었던 것은 당시 화교들이 단신으로 고향땅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관동군이 중국을 떠나는 화교들의 가족 동행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화교 정착 초기에는 아이들의 수가 적었지만 화교 사회가 발전하며 아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화교학교의 설립도 이뤄졌다. 기록에 따르면 전주화교학교는 1945년 양진옥 선생을 중심으로 전주 다가동에 마련된 화교서당이 그 시초였다. 화교서당은 1946년부터는 전주화교 소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규모도 점차 커지면서 1960년대에는 교사 4명, 재학생이 120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중국인들이 해외에 정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식당을 만드는 일이라는 말도 있듯 전주 화교 사회의 발전에도 중국 식당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목집, 청요리집을 운영하던 초기 화교들의 전통을 이어 1970년 전후 윤전승씨의 아들 가흥씨와 가빈씨의 흥빈관, 홍콩반점 그리고 임국량씨의 진미반점, 아관원 등의 중국 음식점이 전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이들 음식점이 있던 다가동 일대에는 화교거리가 조성되었다. 화교 음식점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다가동 화교거리에는 수십여 개의 화교 상점이 성업을 했다.
그러나 화폐 개혁, 토지소유 제한, 사업자의 각종 제한 등 여러 차례 이어진 화교 경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규제와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 속에서 화교 사회는 그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한편으로 요식업 종사 화교가 많은 것도 다른 업종에 대한 진출을 어렵게 만든 여러 규제 탓이기도 하다. 많은 화교들이 차례로 대만과 미국으로 떠나감에 따라 다가동 차이나타운도 쇠퇴일로로 접어들었다. 현재 다가동에는 20개 남짓의 화교 상점들이 남아 차이나타운의 명맥을 잇고 있다.
▲ 전주, 떠나있는 화교들의 고향 될 수 있어야
전주 차이나타운의 흥망성쇠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 본 이로는 왕국민씨가 꼽힌다. 중국 본토 산동 '황현'이 고향인 왕씨는 해방 이전 6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포목점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주로 이주하여 근 70여 년을 전주 화교거리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노년에 이른 그는 지금까지도 중화요리 재료를 공급하는 '신흥상회'를 운영하며 전주화교거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부부 중 누군가 아프게 되면 전주를 떠나 자식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만으로 갈 생각이라고 한다. 왜 그는 자신의 노구로 하여금 모든 삶을 바친 이곳 전주에서 마지막 안식을 취하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70년의 세월로도 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벽이 그 자리마저 빼앗은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이곳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전주화교들 그리고 유년 시절 전주화교학교를 졸업하고서 대만 등지로 떠나있는 2세대, 3세대 화교들의 고향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이들의 삶이 이 땅을 살아온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삶임을 온전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양승수 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기자(전주세계소리축제 전 프로그램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