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20년 인생 녹아있죠"

"저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 '잎싹'과 같습니다. 이 작품으로 이제야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찾고 꿈을 향해 자유롭게 내달릴 수 있는 한 걸음을 뗐어요. '마당으로 나온 수탉'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최근 종로구 필운동 명필름 사무실에서 만난 오성윤(48) 감독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회사 '오돌또기'의 대표로서 명필름과 함께 '마당을 나온 암탉'을 공동 제작하고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 제작 파트를 총지휘했다.

 

오는 28일 이 작품의 개봉을 앞두고 오 감독은 '감개무량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며 제대로 된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향해 달려온 지난 20여년의 역사를 들려줬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자연스럽게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결국 미대에 갔는데, 이상하게 그림을 그릴수록 내 자신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끼고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학교 안에서 친구들과 연극 써클을 하면서 그런 갈증을 풀었죠."

 

순수예술보다 사람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대중예술 쪽에 더 매력을 느낀 그는 "붓을 꺾고" 졸업 후에도 영화판을 맴돌았다고 한다.

 

"영화를 하고 싶은데, 초짜니까 접근이 힘들어서 내가 가진 재주가 그림이니까 그림으로 영화를 하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림과 연극, 영화를 공부했던 게 수렴돼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의 길로 온 것 같아요."

 

그는 스물여덟살에 작은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가 단편부터 창작기획을 시작한다. 또 단편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 작업부터 녹음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프로듀서로도 일했다. 하지만, 단편으로는 늘 허기가 남았다.

 

"이래선 안되겠다, 극장용 장편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1994년에 애니메이션 회사를 직접 차렸습니다. 그런데 기획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더군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른 교육용 애니메이션 작업들을 받아서 아르바이트로 하면서 계속 극장용 장편을 시도했죠. 그런데 특히 시나리오가 안 나오니까 문제였어요. 국내에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실패했던 원인이 스토리, 시나리오라고 봤기 때문에 시나리오 선정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창작 시나리오를 고집하던 그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 창작을 포기하고 외부에서 콘텐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일하던 팀원의 추천으로 황선미 작가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접하게 됐다.

 

"작품이 워낙 훌륭하더군요. 담고 있는 메시지도 그렇고 이야기 흐름도 좋았고요. 어느 정도 확신이 들어서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즈음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오 감독과 심 대표가 의기투합했을 때 특히 공감한 부분은 국내에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없다는 점이었다. 동갑으로 당시 둘 다 같은 또래의 초등학생 딸을 둔 부모로서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일치한 것.

 

"이 작품 전에 기획했던 것들은 '가족영화로서의 애니메이션'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 그 부분을 바라보지 못했나 아쉽습니다. 국내의 다른 작품들도 성인용 기획이 많았죠. 이 작품을 감독하면서 '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작품'이라고 봤어요.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으로 호응을 받으려면 가족영화로서 이 작품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 감독이 작품에 정성과 심혈을 기울일수록 제작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연주의 애니메이션'을 지향하는 그는 이 작품을 미국의 디즈니나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채우고자 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인 만큼 이 땅의 자연과 생태계를 오롯이 담고 싶은 욕심도 컸다. 그런 그의 눈에 강하게 들어온 장소가 경남 창녕 우포늪이었다.

 

"처음에 기획 단계에서 TV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우포늪 특집이었어요. 민물거북이와 수달, 여러 동물들이 나오는데, 공간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작에는 저수지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저수지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생태계도 다양하지 않거든요. 생태계 다양성을 담기에도 우포늪이 딱 적당하겠더라고요. 우포늪의 사계를 담기 위해 매 계절마다 답사를 가서 꼼꼼하게 조사하고 스케치했죠."

 

우포늪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에 변화를 준 부분도 있다. 특히 극에 감초 역할을 하는 수달 캐릭터는 원작에는 아예 없는데, 오 감독이 우포늪에서 직접 '캐스팅한' 동물이다. 이렇게 캐스팅한 동물들이 총 200마리쯤 된다고 했다.

 

암탉 '잎싹'을 좀더 발랄하게 표현하기 위해 잎싹의 꼬리에 우포늪에서 봤던 자운영 꽃을 꽂아넣은 것도 그다.

 

그는 특히 수준높은 그림을 완성하는 데 지독하게 매달렸다. 정서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2D를 택했지만, 2D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색채와 움직임을 풍부하게 보여주기 위해 모든 장면의 빛과 채도 등을 다르게 설정해 일일이 그렸다.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정서적인 느낌을 담기 위해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과는 달리, 배경 스케치 위에 연필로 세밀묘사하듯이 한 번 더 그리는 과정을 더했다.

 

사무실 상주인원은 30명 정도, 후반 작업 때는 외부 인원까지 150여명이 이 작품에 매달렸다.

 

그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화를 애니메이션에 구현해 보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동양화와 판화의 이미지를 넣어보고 싶었어요. 훌륭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자연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서에 맞게 데폼(변형)시키거든요. 동양화에서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죠. 그래서 초기에 동양화적인 표현을 많이 시도를 했는데, 90분짜리 애니메이션을 그것만 갖고 끌고 가기엔 한계가 있더군요. 결국 절충점을 찾아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이 접목된 그림으로 갔는데, 나중에라도 동양화적인 시도는 또 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국내 애니메이션이 뛰어난 기술력과 인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음에도 기획력이나 인적 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우리 애니메이터들이 정말 잘 그려요. 해외에서 인정도 많이 받죠. 이번 작업을 하면서 요소요소에 좋은 멤버, 스태프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걸 깨달았고요. 그런데, 저만 해도 그런 좋은 노하우를 엮어내는 데는 아마추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생계 문제, 돈 문제를 어떻게 보장해줄 것이냐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됐어요."

 

20여년 노고의 결실을 보게 된 기분이 어떨까.

 

"우리 딸들이 늘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궁금해했는데, 드디어 만화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찾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내가 대중예술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맞구나 싶고요. 애니메이션의 방향에 대해서도 신념 같은 게 생겼어요. 촌스럽게 '자연주의 애니메이션'라고 하는데, 작품 안에서 대중들과 함께 숨쉬고 싶어요. 또 '오돌또기'의 정체성이 이 작품과 함께 대중들에게 인식되길, '지브리'처럼 색깔 있는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