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페이퍼코리아④고려제지의 몰락

문어발 경영에 정부 지원 끊겨 자금난 '쇠락의 길'…1972년 9월 공매처분

고려제지 군산공장에서 새로 도입한 초지기를 운반하고 있다. (desk@jjan.kr)

달도 차면 기울고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이 근 20년간 국내 신문용지업계의 절대적 존재로 군림해오던 고려제지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고려제지는 경쟁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초창기에 비해 기업경영여건이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 사이 막대한 이윤을 남겨 제지업 뿐 아니라 다른 사업분야에도 투자를 하면서 1969년께에는 동원탄광을 비롯해 풍국제지, 어류양식업체인 부간산업과 특수광물수출업체인 수중광업, 어류수출업체인 한양수산 등 여려 계열사를 거느린 '고려제지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창업주인 김원전씨가 제지업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경험이 없는 탄광업과 어류양식업체 등에 손을 대는 것은 물론 정계에까지 진출하면서 기업기반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등의 경영상 착오를 저지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관계당국의 자금지원 중단은 고려제지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4.19이후 민주당정부와 5.16이후 군사정권이 고려제지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의 경우 국내 제지사업을 주요 국책사업의 하나로 책정해 집중 지원하였으나 고려제지는 김원전씨가 군사정권과 공화당에 비협조적이어서 일체의 자금지원이 중단됐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만큼 고려제지에 대한 관계당국의 지원은 극히 미미했다.

 

 

 

고려제지 군산공장에서 생산한 신문용지 검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desk@jjan.kr)

 

실제 1965년 전후 고려제지는 모 제지업체와 함께 각각 250만불씩 상업차관을 신청했으나 모 제지업체는 신청금 전액을 승인받은 반면 고려제지는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후 1968년 220만불의 대일청구권자금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앞서 추진한 공장건설 자금과 운영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새로 도입한 초지기조자 조립작업을 하지 못하고 야적장에 방치되는 등 고려제지의 붕괴 조짐이 도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김원전씨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지만 이미 기운 회사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9년 생산실적이 1만8501t으로 전년대비 11.4%나 감소하는 등 몰락의 최종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던 것.

1972년 초에는 임금마저 제대로 주지 못해 이 해 10월초에는 체무임금이 1900만원에 이르렀다.

그 뿐만 아니라 운영자금의 고갈로 제지공장을 더 이상 가동시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창업주인 김원전씨는 거의 포기상태의 상황에 처했다.

회사사정이 악화일로를 걷자 종업원들은 구사운동에 발 벗고 나서며 공장 정상화에 혼신을 기울였다.

이들은 5억원이나 되는 거금의 운영자금을 마련해 1972년 2월부터 7월까지 직접 공장을 가동시키는 등 구사운동에 적극 나섰으나 종업원들만의 힘만으로는 공장을 재기시킬 수는 없었다

고려제지는 1972년 9월까지 조흥은행에 20억원, 산업은행에 3억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당시 고려제지는 연간 약 2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 수익금만으로는 부채 이자를 갚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주채무은행였던 조흥은행은 고려제지 소유의 자산을 모두 처분한다고 해도 부채를 회수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렇다고 한없이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 입장이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에따라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정책에 의거해 1972년 9월 30일 고려제지를 공매처분했고 주채무은행였던 조흥은행이 12억원에 낙찰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때 '고려제지왕국'으로 불리었던 고려제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고려제지의 붕괴는 20여년간 고려제지와 함께 했던 김원전씨에게 인생의 허무함과 기업인으로서의 불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매일경제신문은 기획시리즈로 게재했던 상업인맥 제지공업편에서 '김원전씨는 우리나라 제지업의 선구자로서의 명예에도 불구하고 1072년 조흥은행이 고려제지를 압류할 때 기업인으로서 치욕을 느껴야만 했다'고 하면서 "모든게 허무하다"고 탄식했음을 그를 아는 측근들이 전해 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