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거리에서] 줄포에서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 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 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 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고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 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