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로명 새주소 사업

민족의 삶·정서가 녹아든 땅이름 우리 문화의 근간 흔들어서야··

 

지번 주소체계를 사용해온 지 100여 년. 정부는 지번 주소체계가 일제의 잔재라거나 국제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10여 년부터 '새주소(도로명 주소) 안내 사업'에 매달렸다. 새주소 사업은 주소의 기준을 지번에서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변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통을 원만히 하려던 새주소 안내 사업이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해 뒤로 미뤄졌다.

 

▲ 새주소 안내 사업 추진 배경

 

행정안전부가 새주소 안내 사업으로 내세운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도로명은 도로의 일정 구간별로 부여하되 그 지역의 특성과 역사성을 반영할 것. 둘째, 도로명을 부여하고자 할 때 해당 도로관리청과 지역 주민 등의 의견을 수렴할 것. 셋째, 건물번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로상에 일련번호(기초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할 것. 정부는 이미 2006년 도로명을 적용한 새주소를 발표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대가 심해 지난해 다시 새주소를 발표했다. 올해 7월부터 전면 실시하려다 반대 여론에 부딪쳐 2년 뒤로 미뤄졌다. 행정안전부는 지번 주소체계가 △ 행정동과 법정동의 이원화 △ 도시화로 인한 지번의 연속성 결여 △ 경로 안내와 위치 안내의 기능 저하 등을 들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제시한 새주소 안내 사업은 편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평생을 살아온 땅이름(동·리)을 모두 없애버림으로써 도리어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지적을 하고있다.

 

▲ 지명을 정하는 원칙

 

지명을 정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대개 풍수적인 요인을 고려하거나 풍토와 특산품, 자연환경이나 기후에 맞추거나 미래를 예견하며 짓는다. 역사적 사건이나 그곳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을 기려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특히 1700년 동안 겨레와 애환을 함께 해오며 민족문화와 정서의 바탕이 되어온 불교 관련 지명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불교계는 "민족문화의 뿌리를 말살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지는 국민에게 물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국민투표라도 해야 할 사안"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새주소 안내 사업이 시행되면 각 시·군·구의 '동·면·리' 등 현재 쓰고 있는 땅이름 2만여 개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이름이 사라지면 문화적 상상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게 한자어이든 본래 땅이름이든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 농촌할 것 없이 마을 이름에서 차츰 고유의 이름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인데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어떻게 지켜갈지 걱정이다. 이는 곧 역사의 단절이나 마찬가지다.

 

▲ 지명에 축적된 우리 문화

 

우리의 땅이름에는 첫째, 산, 내, 초목, 바위, 고개, 포구 등 자연환경이 담겨 있다. 둘째, 샘, 못, 다리, 성(城), 학교, 시장, 창고, 주막, 상점, 정자, 관청이나 치소(治所) 등 인간이 생활하면서 만든 것이 담겨 있다. 셋째, 신당, 장승, 선돌, 탑, 절 등 신앙과 관련된 것이 있다. 그 밖에 서원, 비석, 시가, 유적, 인물 등과 관련한 땅이름이 있다.

 

예를 들자면, 군산의 '소뫼(牛山)'는 소를 맸던 곳이고, 임실의 '벗내(柳川)'는 버드나무가 있는 천이고, 익산의 '새실(草谷)'은 갈대가 우거진 마을이고, 고창의 '대매(竹山)'는 대나무가 많은 산을 뜻한다. 고창·익산·남원의 '성남(城南)'은 성의 남쪽이고, 남원·익산의 '성내(城內)'는 성 안에 있는 마을이다. 고창·완주·전주·김제·부안의 장승백이는 장승이 서 있던 곳이다. 이처럼 땅이름에는 자연환경과 삶이 배어 있다.

 

▲ 새주소 안내 사업, 신중하게 추진돼야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다음의 도로명은 좋은 이름이다. 전주는 견훤이 도읍했던 곳이기에 견성(甄城)으로 불리던 곳이다. 견훤로, 견훤왕궁길, 경훤왕궁로가 있다. 익산에는 무왕로, 선화로, 가람로가 있다. 가람은 시조시인 이병기의 호다. 군산에는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진포가 있어서 진포로, 진포길이 있다.

 

정읍에는 샘골로, 무성길, 동학로가 있다. 이는 옛이름, 무성서원, 동학농민혁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원에는 춘향로, 월매길, 월매안길 등 춘향전과 관련한 이름이 있다. 김제에는 벽골제로, 지평선로가 있는데, 벼골(벼가 나는 고을)로 했으면 어땠을까? 부안에는 신석정의 이름에서 따온 석정로, 고창에는 고인돌공원길, 고인돌대로, 모양성로, 진안에는 마이산로, 장수에는 논개로, 논개사당길, 논개생가길 등이 있다.

 

전주는 옛 이름이 비사벌, 익산은 솜리이다. 이런 길이름은 없는데 살렸으면 좋겠다. 익산에는 원불교 총부가 있으니 소태산 박중빈의 이름을 딴 소태산로(길), 정읍에는 전봉준로(길), 순창에는 고추장로(길), 남원에는 이몽룡로(길), 김제에는 진묵스님을 기리기 위해 진묵로(길)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현재 쓰는 이름을 그대로 쓰되, 잘못된 이름은 제자리를 찾아주고, 토박이 땅이름으로 바꾸고, 역사적인 인물이나 유적지, 역사적 사건도 찾아 써서 내 고장에 대한 애향심을 기를 수 있으면 좋겠다.

 

행정안전부는 1996년부터 준비한 도로명주소법을 올해 7월 시행하려다 2년간 기존 지명과 병행해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만일 새주소 안내 사업이 필요하다면 몇 개 도시를 선정하여 실시해 보고 확대하는 것도 한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적 합의 없이 2014년부터 전면적으로 확대해 실시하겠다고 하는 건 1000년 이상 축적되어온 문화콘텐츠를 일거에 없애버리는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이택회 문화전문시민기자(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