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문용지 생산 1위 업체 자리를 전주제지에 빼앗긴 세대제지는 옛 고려제지 군산공장의 대대적인 시설 보수를 통해 기존의 연간 생산능력 2만톤을 회복했지만 군산공장이 문을 닫은 사이 연간 생산능력을 6만톤으로 증대한 전주제지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세대제지는 고려제지 시절 도입해 공장 구내에 야적돼 있던 새 초지기의 조립작업에 주력, 마침내 1974년 12월부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이 제3호 초지기는 고려제지가 1968년 2월 대일청구자금 220만불을 획득해 일본 I.H.I에서 제작해 온 것으로 지폭은 5130㎜ 였다.
그러나 제3호 초지기가 준공되는 과정에서 우려곡절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3호 초지기에 큰 기대감을 갖고 있던 고판남 대표가 제작사인 일본 I.H.I에서 기술자를 초청해 조립공사를 하려고 한 반면 현장 기술진들(고려제지 시절)은 자신들의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자신해 자체 조립공사를 함으로써 새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
그렇지만 매사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초지기를 자체 조립했으나 막상 시운전을 해보니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전기계통의 조립이 완전하지 않아 속도 조절 등 계기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
결국 고판남 대표는 일본 I.H.I에 부탁해 전기 기술자와 조립 기술자를 초청해 초지기 조립을 마칠 수 있었다.
하루 12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제3호 초지기 준공으로 2만톤에 그쳤던 세대제지의 연간 생산능력은 단번에 그 3배인 6만톤으로 중가해 전주제지와 동일한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에 따라 세대제지는 연간 생산능력이 우리나라 신문용지 생산 업체에서 36.0%로 차지하며 전주제지와 함께 공동 1위에 오르며 고려제지 시절의 위상을 되찾았다.
실제 1976년 3월 기준 국내 신문용지 생산업체별 연간 생산능력은 세대제지와 전주제지가 6만톤으로 가장 컸고 그 뒤를 이어 대한제지와 삼풍제지가 각각 1만9800톤, 삼진제지가 6600톤의 순을 보였다.
당초 제3호 초지기는 1970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관계당국이 초지기를 설치할 공장 건물의 신축자금만 융자해주고 이 밖에 소요될 일체의 자금 융자를 해주지 않아 조립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방치돼 있던 것을 세대제지가 고려제지를 인수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이때문에 만일 고려제지 시절 이 초지기가 조립 준공돼 계획대로 1970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면 고려제지가 계속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않다.
제3호기의 본격 가동은 국내 신문용지 생산시설 용량을 37.5%나 증가시켜 국내 신문용지의 만성적인 부족상테를 자급자족이란 오랜 숙원을 해결하는 결실을 맺게 했다.
세대제지는 또한 국내 최초로 신형 박피기를 설치하며 신문용지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대제지는 고려제지 군산공장이 원래 일본 왕자제지 계열의 분공장격이었던 관계로 고려제지 인수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왕자제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문에 업무협의차 일본을 왕래했던 세대제지의 한 간부가 1976년 우연한 기회에 북해도에 있는 왕자제지의 도마꼬마이공장에서 1개월동안 선진제지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이때 도마꼬마이공장에서 신형 박피기인 드럼바커(Drumbarker)에 주목한 세대제지 간부는 공장측에 간청해 설계도면을 얻어 국내 최초로 드럼바커를 군산공장에 설치했다.
기존의 박피기는 처리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력소비 및 소음이 큰 반면 이 신형 박피기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해 효용성이 매우 컸다.
지금 생각하면 결코 대단한 장치라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계로 평가받았다.
그후 전주제지도 이를 본떠서 드럼바커를 만들었다고 한다. 1978년 12월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