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으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박성우 詩 「물의 베개」 中)
여름 강이 배를 드러내놓은 채 누워 있다. 며칠 동안 내린 폭우를 잔뜩 머금고 훌러덩 제 살을, 제 속을 고스란히 펼쳐놓고 있다. 물이 차오른 강은 모든 것을 안고 흐른다. 거대한 기암괴석도 모래밭도 짙푸른 녹음도 제 품에 안은 채 흐른다. 여름 강은 엄마의 가슴이다. 탱탱하게 오른 풍만함이 산천에 젖을 물린 채 제 몸을 풀고 있다.
진안 죽도(竹島)는 육지 속의 섬이다. 강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흘러 하늘에서 보면 예쁘게 빚어 놓은 '송편'이다. 동북쪽은 덕유산에서 흘러온 구량천이 휘돌고, 서남쪽은 금강 상류 물길이 감싸 안는다. 죽도엔 한자 그대로 산죽이 지천이다. 겨울이면 흰 눈 사이로 댓잎이 청량하고 여름이면 곧게 뻗은 줄기로 햇살이 퉁긴다. 구량천이 죽도를 지나면서 금강 상류에 몸을 섞는다. 말 그대로 '두 물머리'이다.
죽도 앞은 진안읍과 동향면, 장수군과 천천면의 경계를 이루며 솟은 천반산(天盤山·646.7m)이다. 천반산은 죽도를 향해 다리를 뻗고 편하게 쉬는 소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용이 머리를 내밀며 엎드린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숭아를 받는 소반'같다고 해서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천반산의 이름에는 3가지 유래가 있다. 먼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천반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정여립의 모반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천반산에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정여립(1546~1589)이 있다.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왕권체제하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던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반체제적인 인물 정여립.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약처럼 위험한 사상으로 장전돼 '대동세상'을 꿈꾸던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론 개혁과 실용을 앞세운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다. 그의 말은 선비사회인 조선에게는 벼락 치는 소리였고 천둥소리였다.
그는 서인(西人)의 수장이었던 율곡 이이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거칠 게 없었으며 선조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율곡도 그를 '당대 천재'라고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율곡이 죽자 그는 동인(東人)으로 정치노선을 바꾼다. 돌연한 변신에 서인들의 격분을 샀음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서인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다.
그는 '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고 '백성이 잘 사는 나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원했다. 양반, 상놈, 농민, 노비 할 것 없이 누구든 뜻을 같이하면 계원이 될 수 있었다. 대동계원들은 천반산에 모여 무술단련과 함께 세상이야기도 나눴다. 전라도뿐만 아니라 저 멀리 황해도에서도 참가자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대동계를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대부가의 낙향한 벼슬아치 출신이 천민들과 어울린 것도,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적인 모임을 만든 것도, 왕위 세습을 거부하거나 충군의 이념을 부인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서슴지 않은 것도 반대세력에겐 좋은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역모를 고발하는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당도됐고, 곧 토벌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시작됐다.
첩보는 구체적이었다. 하지만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과 선조는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당도한다. 변고는 거듭됐고, 얼마 후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문초함)을 시작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후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 대화 한 번 한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됐다.
▲ 음모 그리고 익지 않은 꿈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동사만록' 中)
정여립은 대역죄로 죽었다. 또한 그가 쫓기다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뚜렷한 물증도 없고 단 한 번도 저항한 흔적도 없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고작 몇 년 앞에 두었고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때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에게는 율곡이 죽자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여립의 꽃은 지고 말았다. 천변산 자락으로 떨어진 꽃은 구량천을 돌아 금강 상류로 흐른다. 물을 잔뜩 머금은 강변이 푸르다. 산죽의 잎새에 퉁긴 여름 햇볕이 도포자락처럼 휘날린다. 말을 타고 천반산을 누비는 정여립의 모습이 강물 위에 비쳤다 사라지는 환영을 본다.
/ 김성철 문화전문시민기자(우석대 한국어센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