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권세호씨, 일제시대 식량수탈 엿볼수 있는 지도 소장

익산 요교호((腰橋湖·황등호)를 중심으로 일제시대의 식량수탈 역사를 엿볼수 있는 뜻밖의 지도를 익산의 한 어르신이 소장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익산시 임상동 임내마을 권세호 어르신(85).

 

이 곳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한평생을 살고 있는 그는 1937년 임익수리조합에서 발간한 임익수리조합간척지평면도(臨益水利組合干拓地平面圖)를 소장하고 있다.

 

이 지도는 요교호 물을 빼고 경지정리를 해서 일본인들이 땅을 팔기 위해 만든 지도다.

 

그로 하여금 요교호를 둘러싼 일제시대 식량수탈의 역사를 들어봤다.

 

요교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요교호 가운데 요교(허리다리,현재의 국도 23호선 황등가는 길)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외화, 내화, 월성, 임상, 정족, 몽환마을이 있는 삼성동 일대는 원래 습지였다.

 

1910년 일본사람이 독수문(현재 독수문가든)부터 황등 남성다리(황등 청남산)까지 1.3km의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습지였던 요교 아래쪽 익산, 임피 땅을 비옥한 간척지로 만들어 쌀을 수탈했다.

 

그래서 그동안 걸어 다니던 길이 1910년부터는 임상동에서 황등까지 가려면 배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지금의 황등 도선마을은 선착장 자리였다.

 

아울러 지금의 탑천 상류지역은 작은 지천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요교호 근처 탑천은 요교호 물이 많을 때는 잠겨있던 곳이다.

 

그러다가 원래 습지였던 요교호가 경작지로 만들지게 됐다.

 

1937년 간척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습지는 논으로 바뀌게 된 것.

 

"이즈음 극심한 가난에 지칠 대로 지쳤던 주민들에게 대단히 기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고장에 침수 피해와 교통의 불편을 안겨줬던 요교호의 넓디 넓은 저수지 물은 만 28년이 지난 1935년 가을 서서히 빼기 시작했고, 193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간척공사를 시작했다. 황등에 갈 때 이용하던 뱃길은 큰 신작로가 되었고 하천은 깊은 공사로 물이 빠지니 넓은 호수가 경지 정리되어 바둑판 같은 필지답 1,200평씩 분할을 1년 만에 완공해 1937년부터 영농을 하게 됐다. 그때까지 도로가 없어 교통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황등 팔봉길이 개통된 후 넓은 신작로에 우마차가 농산물을 유유히 운반하게 되었으니 벽해가 상전이 된 격이었다."

 

권세호 어르신이 기억하고 있는 요교호의 역사다.

 

일제는 1935년 완주군 화산면 경천저수지를 만들어 하류지역에 쌀농사를 짓게 해 쌀 수탈 면적을 늘렸다.

 

그 당시 경천저수지 수몰민들 가운데 이주 희망자는 경작하던 영농면적을 감안하여 요교호 간척지 농지를 배정하고 초가삼간을 신축하여 정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