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주보기] 가을 소묘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

 

오랜만에 들어 보는 패티김의 '구월이 오는 소리'가 가을 길목을 재촉하고 있다.

 

가을 문턱에 서면 늦 매미는 울음소리가 급해진다. 낚시꾼은 가을빛 짙어가는 물빛을 보고 낚시가방을 챙기고, 산행객은 색이 쏟아지는 산천초목을 찾아 몸 기댈 준비를 한다.

 

그림쟁이는 메말랐던 붓을 씻고, 시인은 시작 노트를 가방에 넣고, 풍각쟁이는 담 너머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춤 쟁이는 덧신을 꿰매고, 고사동 사진쟁이는 렌즈 닦으며 마누라 눈치를 살핀다.

 

풍남동 노신사 역시 지난 가을 이후 옷장 속에 자고 있는 카키색 트렌츠 코트를 흔들어 깨운다.

 

입추, 처서가 지나자, '아침에 책보만한 햇빛이 들었다가 해가 손수건 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는 이상의 '날개' 한 구절처럼 가을이 짧게 다가온다.

 

전주에서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더 있다면 전주의 가을맞이다. 살아가면서 변해서 좋은 게 있고, 정취가 그대로 보존 되어서 좋은 게 있다.

 

가을빛에 물들어가는 전주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오히려 더디게 적응해가는 정서가 좋다.

 

해질녘이면 사방으로 걸어 15분이면, 진흙토벽에 상아색 치마, 진보라 저고리 걸친 주모를 볼수 있고, 다가교 달맞이꽃과 망초대를 곁에 두고 용산다리 족발집까지 마냥 걸어 소주 한잔의 낭만이 있다.

 

돌아오는 길 가을 달밤에 긴 그림자 앞장세우고 걷다보면 모악산 언저리에 촘촘히 박혀있는 또렷한 별들을 헤아릴 수가 있어서 좋다.

 

전주의 가을은 큰 소쿠리에 들어 앉아있다. 한옥마을 골목길 모퉁이의 과꽃 한 움큼이 그립다. 작대기에 걸쳐진 빨랫줄은 어린 조카 운동화, 책가방, 여름 내내 수고한 삼베 홑이불, 시어머니 명주치마가 너풀대고 있다. 흙 담장 밑, 머웃대, 토란, 깨대, 고추 마르는 소리가 고소하다.

 

양푼 밥 비벼주는 골목안 주막집은 주막집대로 가을에 젖는다.

 

전주 가을 골목은 느림의 미학을 찾아 볼수 있는 완행열차다. 가을의 무게를 실은 경기전과 객사, 남부시장 콩나물국밥과 중앙시장 순댓국, 덕진공원 풍광과 소리의 전당 전시물이 가을을 느리게 젖게 한다.

 

경기전 처마 안으로 가을볕이 길게 들어와 앉는다. 전주의 느린 가을소묘가 추억으로 차곡차곡 저장되어 가듯 가을을 방황하는 전국의 사람들을 이끄는데 아름다운 마인드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