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심수관과 한·일 교류 - 조상진

20여 년전 두차례에 걸쳐 일본 가고시마현(鹿兒島縣) 미야마(美山)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쓰마 도자기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14대 심수관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의 선조는 정유재란 당시인 1598년 남원성에서 다른 도공(陶工)들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 와 정착했던 것이다.

 

'사쓰마야끼가(薩摩燒家) 14대(代) 심수관(沈壽官)'이란 문패가 붙어있는 대문을 지나 들어간 그의 집은 고풍(古風)이 감돌았다. 집 안팎이 왕대나무로 덮여 있고 도자기를 굽는 가마들이 가지런히 엎드려 있었다.

 

작업복 차림으로 우리 일행을 맞은 그는 차를 마시며 여러 얘기를 나눈 후 이 집의 보물인 수장고(收藏庫)로 안내했다. 2층으로 된 수장고에는 초대부터 14대에 이르는 갖가지 작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초대에서 9대까지의 작품은 소박해 보였다. 특히 초대 심당길의 작품인 찻잔은 흙과 유약을 조선에서 가져왔고 불과 물만 일본에서 조달한 것이어서 의미가 각별했다. 이후의 작품은 그림과 색채가 화려했다.

 

사쓰마 도자기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2대 심수관이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 부터. 이 박람회에서 유럽인들은 사쓰마 도자기의 정교하고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했다. 당시 출품했던 높이 1m 55㎝의 대화병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어 1902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끌려왔던 우리 조상들이 배웠다는 한글교본이었다. 그는 한어훈몽(韓語訓蒙) 교린수지(交隣須知) 숙향전 표민대화(漂民對話) 등을 들고 와 직접 설명해 주었다.

 

이후 그는 한국명예총영사에 임명되었다. 1998년에는 납치 400년을 기념해 400년제(祭)를 가졌다. 역대 작품을 모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남원에서 불씨를 채화해 일본으로 가져가는 이벤트로 큰 관심을 모았다.

 

심수관 가문의 고난과 영광은 한일 양국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한국인 핏줄이 만들고 일본인이 키워 온 예술혼은 앞으로 양국이 나아갈 방향까지도 제시해 주고 있다.

 

마침 부안 대명리조트에서 제13회 한·중·일 지방정부 교류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가고시마현 이토 유치히로(伊藤祐一郞) 지사가 참석해 400여 년 전의 일을 언급하며 교류 활성화를 강조했다. 새삼 한·일은 가깝고도 먼 나라임이 느껴졌다.

 

/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