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청춘과 사랑, 그리고 추억 보고서

"무엇을 하건 어정쩡하고 무엇을 꿈꾸건 너절했으니 그게 바로 90년대. 80년대가 격렬했다면 90년대는 야비했습니다. 80년대가 야생마 같았다면 90년대는 그늘에 숨은 고양이 같았습니다."(32쪽) 소설가 한차현(41)의 새 장편 소설 '사랑, 그녀석'(열림원 펴냄)은 1990년대의사랑과 추억에 대한 보고서다.

 

"인터넷커녕 PC통신도 없던 시절. 핸드폰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신용카드커녕 교통카드도 없던 시절. (중략) 인터넷 검색 사이트도 스마트폰 앱도 없지만 만나서 함께 다니는 곳은 어디건 서울 뒷골목의 숨은 맛집이요 주말 저녁 데이트 추천 명소였습니다."(129쪽) 작가는 어깨에 힘을 빼고 종로 피맛골 민속주점 일지매와 종로3가 나이트클럽 서울테크 등 1990년대 서울의 숨은 명소로 안내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거리에서 신해철의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를 듣고 TV 드라마 '서울의 달'과 '야망의 세월'의 내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저자는 7080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에 끼어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1990년대를 주목했다.

 

그는 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탄생한 시기"라며 "1990년과 1999년을 떼어 놓고 비교해보면 90년대가 80년대나 2000년대 등 다른 시기보다 변화가 훨씬 컸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작가가 느끼는 90년대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1990년대를 묶는 단어나 상징은 뚜렷하게 없는 것 같다"면서 "1990년대 문화도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힘줘 말했다.

 

89학번인 저자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의 경험을 버무렸다.

 

아예 '한차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연인 은원만 빼면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을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

 

은원도 아내 문은 씨를 토대로 한 캐릭터다.

 

차현이 대학 선후배와 함께 소설가 박범신을 만나는 일화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소설은 90년대 거리를 누비는 연인의 이야기다.

 

대학에 입학한 주인공이 실연의아픔을 겪고 나서 우연히 시작한 연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줄거리다.

 

전작 '변신' '왼쪽 손목이 시릴 때' 등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펼친 그는 "이전작품에서는 음모론이나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무겁지 않은 연애 소설을 써 봤다"고 말했다.

 

첫사랑 선배인 미림에게 퇴짜 맞은 차현은 동기 은원을 불러내 '위로주'를 얻어먹는다.

 

그러다가 술김에 은원에게 '뽀뽀'를 요구하고 은원은 차현을 달래려고 이에 응한다.

 

예상치 못한 뽀뽀가 맺어준 두 사람의 인연은 갈수록 깊어진다.

 

춘천으로, 대전으로 여행을 하고 차현이 입대하기 직전 마침내 잠자리까지 함께하게 된다.

 

복학 후 차현은 소설가의 꿈을 키워간다.

 

차현은 3년 후배 정민과 가까워지다가은원에게 들키고, 영어 강사로 일하던 은원이 콜롬비아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둘의 관계가 위기를 맞기도 한다.

 

한 작가는 "소설은 90년대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사실 사랑은 100년 뒤에도 통할주제"라며 "다른 작품에 비해 내 감정이 많이 실렸고 무척 즐겁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90년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시시콜콜 더해지면서 소설은 더욱 풍성해졌다.

 

한 작가는 90년대 신문철을 쌓아 놓고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집필했다고 한다. "금융실명제와 공직자윤리법, 우루과이 라운드와 쌀 개방. 칼국수를 먹으며 '겡제'를 '학실히' 살리겠다던 김영삼의 1년은, 한마디로 'YS는 못 말려'였습니다.(중략)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 가스 폭발과 거기 이어지는 소통령 김현철비리, 비뇨기과 몰래카메라에 한보 사태에 IMF 외환위기까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이전이었지요."(221쪽) 한 작가는 "90년대에 청춘을 보냈고 소설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과거를 한 번쯤 여유 있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372쪽. 1만2천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