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崇海深, 遊天戱海(산숭해심, 유천희해)-老阮?筆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장난질 하고. -늙은 완당이 멋대로 쓰다
山:메 산/ 崇:높을 숭/ 海:바다 해/ 深:깊을 심/ 遊:놀 유/ 戱:놀 희, 희롱할 희/ 阮:성시 완/ ?:속일 만, 거만할 만/ 筆:붓 필
이 작품은 현존하는 추사 작품 중 규모가 가장 큰 작품으로서 한 폭의 크기가 가로 207×세로42cm나 된다. 그런데 두 구절 중 '遊天戱海'라고 쓴 폭에만 '老阮?筆'이라는 관기(款記)가 있고 '山崇海深'이라고 쓴 폭에는 아무런 관지가 없다. 따라서 이 두 폭의 글씨가 원래는 두 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게 아니고 한 폭으로 이어진 가로 길이 414cm의 대형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홍준은《완당평전》에서 1957년 3월 대한고미술협회가 주관한 경매전에서 관기가 없는〈산숭해심〉은 55만환에 관기가 있는〈유천희해〉는 121만환에 낙찰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두 폭이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이산가족'신세를 면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마치 각 폭이 한 작품인양 각 폭의 끝부분에 같은 도장이 찍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찍혀 있는 도장들은 추사가 당년에 찍은 게 아니라 두 작품이 분리된 이후에 누군가가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작품은 추사 서예의 호방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거칠면서도 제대로 박힌 필획에 탄탄한 결구 그리고 여덟 글자를 가로로 이어 쓰면서도 어느 곳 한 곳 이지러진 데가 없는 웅장한 장법 등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작품이다. 이른 바, '살아있는 필획'을 구사하는 운필법 중에 종이와 붓이 마치 사포(砂布)에 문질리는 것 같은 강한 마찰감을 느끼도록 하는 운필이 있는데 이를 '향상도하(香象渡河:코끼리가 강을 건너듯)'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본 연재 추사〈계산무진〉조 참고). 이 작품이야말로 전형적인 향상도하의 필법으로 쓴 작품이다. 추사 이후 지금에 이르도록 이처럼 큰 대작을 이렇게 참신하면서도 기괴한 결구를 이루면서 이처럼 호방하고 웅장하게 쓸 수 있는 작가는 추사 외에는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쓴 '山崇海深, 遊天戱海'라는 글의 뜻은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할까? 추사는 자신이 스승으로 받들었던 청나라의 서예가 옹방강(翁方綱)의 실학정신을 칭송하면서 "山海崇深"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기는 하나(국립중앙박물관《추사 김정희》2006, 85쪽 참조) 여기서의 '山崇海深'도 그런 의미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필자는 이 '山崇海深'의 의미를 굳이 옹방강과 연계하지 않고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팽구년(彭龜年1142~1206)의 시와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글에서 찾고자 한다. 팽구년은〈광수(廣壽=長壽〉라는 시에서 "누가 장수하기를 마다하겠는가? 장수하는 방법으로는 덕을 쌓는 것보다 나은 게 없지.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을 누릴 수 있다네."라고 읊었다. 그리고 범성대는 한나라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의 사당에 대한 기(記)에서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엄광의 인품과 도덕이 산처럼 높고, 맑은 명예가 강물처럼 길게 오래도록 이어질 것을 칭송한 말이다. 추사가 쓴 '山崇海深'은 범성대가 쓴 '山高水長'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山崇海深'이라는 말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과 '산처럼 높은 인품으로 강물처럼 길이 전할 명예'를 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遊天戱海'는 말은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 사람 소연(蕭衍)이 위(魏)나라 때의 명필인 종요(鍾繇)의 서예를 평하여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 떼의 비상처럼 비록 빽빽하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구름 같은 고니가 하늘에서 놀듯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인 "群鴻戱海, 雲鵠遊天(군홍희해, 운곡유천)"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하늘에서 노는 고니처럼 한가하게,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롭게'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제 '山崇海深, 遊天戱海' 두 구절을 이어서 뜻을 부연하여 풀이해보도록 하자.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과 산처럼 높은 인품과 강물처럼 길이 전할 명예를 누리소서. 그리고 하늘에서 노는 고니처럼 한가하고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