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우(朴鳳宇, 1943~1990)는 광주 출신의 시인이다. 그는 1975년에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시립도서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록 다른 지역 출신이나, 그를 전북 시인의 범주에 포괄할만한 이유이다. 그와 같은 작고문인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행장을 수습하는 일에 서두를 일이다.
박봉우는 광주 서석초등학교 시절에 전학년간 급장을 맡을 정도로 수재였다. 그는 초등학교 재학 중에 동요가 입선되고, 중학생 시절에 '진달래' 동인을 결성하는 등, 조숙한 문사의 기질을 드러내었다. 그의 문학 활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미 극에 달했다. 일찍부터 문재를 빛낸 그는 ??학원??의 단골 투고생이었고, 시 ?石像의 노래?가 ??문학예술??에 당선된 기성시인으로, 친구들과 4인시집 ??상록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명성 덕분에, 광주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시내 여고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시인 행세를 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의 행각은 서울까지 이어져, 동년배 시인 박성룡과 함께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조병화의 단골 다방이었던 문화사롱을 출입하기도 했다.
전남대학교에 다니면서 시동인지 ??零度??를 발간한 그는 1956년 시 ?休戰線?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의 각광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주목할만한 신인으로 오르내렸고, 시단의 흐름을 단박에 바꿔버렸다. 새로 나온 겁 없는 신예시인이 "山과 山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같은 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라고 문단의 안일을 힐난하며 분단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그로부터 이 나라에 분단문학이 발아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박봉우는 계속하여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江과 또 山을 넘어야 진종일을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나비와 鐵條網?)면서 민족의 비극을 시화하여 "50년대의 기막힌 이야기"(?窓은?)를 쓴 '분단시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박봉우는 지방 신문의 주재 기자로 재직하던 중에 집단폭행을 당한 후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앓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그의 정신 상태는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하였고, 급기야 정신병동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조국과 민족의 비운에 분노하면서 "머리를 앓고 사는 사람들"(?정신병원?)의 병후를 걱정하는 한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무덤 같은 잠"(?죽은 듯 눈 감고 싶다?)을 청하며 인생무상을 탓하기도 했다. 더욱이 마땅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부인과의 사별은 그의 내면에 심한 죄책감을 각인시켰고, 그는 스스로 "蒼白한 病室의 美學者"(?겨울에도 꽃피는 나무?)로 자처하면서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고독과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는 시인의 고독을 동시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남긴 후기시편에서 공통적으로 검출되는 정서는 삶의 공허감이다.
천재의 질병으로 알려진 정신 이상은 그의 시재를 조로화시켰다. 그는 "경무대는 이제 시인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시인들의 공원이 되어야 해"라거나 "노벨문학상은 그리고 노벨평화상은 내가 탄다"면서 거침없이 울분을 토하고 정견을 발표하던 그는 전쟁의 참극이 진정될 무렵에 발생한 4월 혁명에 의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소망과 달리, 군사정변에 의해 혁명이 전복되어버리자 그는 극심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 시절의 절망감은 "이젠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라는 자포자기적 시편에서 엿볼 수 있거니와, 그는 '서울 下野式'을 마치고 낙향한다.
박봉우가 전주에 도착한 이후의 시편들은 후기시에 속한다. 그는 이 시기에 서울 생활에 실패하여 안정된 직장을 잡지 못하다가, 전주시장으로 재직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전주시립도서관에 취직하여 타향살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전주는 삶에 지친 박봉우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전주의 문우들은 맛의 고장에 사는 사람들답게 그의 "주점을 찾고 싶은 욕망"(?黑室素描?)을 흡족시켜 주었고, 인정 많은 시우들은 잔정을 베풀며 즐거이 시를 토론하였다. 또한 그는 전주 사람들의 배려에 힘입어 불성실한 근무와 숱한 이석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부터 퇴출되지 않았고, 유명한 남부시장에서 술과 함께 일상을 소비할 수 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전주에서 보낸 한 철이 박봉우에게는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시 외의 여타 부문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그의 행동은 포장마차를 이끌며 생계를 책임진 부인의 병세를 악화시켜 심각한 자책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박봉우는 부인을 닮은 딸에게 "슬픈 것 감추고/아름다운 것만 들어내어/너에게 주마"(?내 딸의 손을 잡고?2?)고 약속하지만, 현실은 그의 꿈을 수락할 만큼 녹록치 않았다. 평생 동안 가난을 달고 살았던 그였으나, 시작의 열정은 전신에 흘러넘쳤다. 착란 중에 "국회의사당은 이제 시인들이 다스릴 곳"이라던 박봉우, 그는 지금 어느 하늘에서 시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