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대 이사장(상산학원)

"수월성 교육은 학생만이 아닌 나라와 미래를 위한 것"

자립형 자립고 전환 이후 상산고의 '높은 문턱'에 대한 이경재 선임기자(오른쪽)의 질문에 홍성대 이사장이 대답을 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홍성대(74) 상산학원 이사장을 처음 만난 건 1983년 상산고에서 교생실습을 하던 때였다. 어느 날 이사장과의 간담회 일정이 있었다. 삽을 들고 화단을 가꾸던 홍 이사장이 신고 있던 장화를 벗고 옷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내며 간담회 장소로 들어왔다. 메시지는 잊혔지만 그 첫 인상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새롭다. 나무 한그루마다 손 때 묻혀 가꾼 상산고는 조경협회가 선정한 한국조경 백선(百選)에 들 만큼 잘 가꿔져 있다. 그리고 이젠 명문 사학으로 우뚝 서 있다. 홍 이사장은 정읍 태인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이다. 24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지난 22일 태인에 들른 홍 이사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태인 소재지에 있는 명봉도서관 관장실에서 2시간 반 동안 이뤄졌다.

 

(인터뷰)

 

▲총동창회장으로서 개교 10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나라 잃은 암담한 시절에도 우리 선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배움의 요람을 열었습니다. 이 나라 교육사에 '1세기의 역사'라는 족적을 남겼으니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친과 제 7남매가 모두 이 학교 동문입니다. 조카들도 이 학교에서 배움을 닦았으니 우리 집안은 3대가 이 학교를 거친 셈이지요. 태인초등학교는 바로 우리들의 고향 집입니다."

 

▲이 곳 명봉(明峰)도서관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1979년 부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많은 분들이 조문해 주셨습니다. 그 부의금에다 부족한 돈을 보태 '재단법인 명봉재단'을 설립하고 '명봉도서관'을 건립했습니다. 명봉은 아버지의 호입니다."

 

명봉 도서관은 홍 이사장 생가 옆 2000여평의 부지에 2층 건물로 지어져 있다. 학생과 마을 주민들이 이용한다. 수형이 제법인 소나무와 잘 가꿔진 정원이 일품이다. 1년에 두차례씩 책을 구입하는데 책 구입비만 3000만원에 이른다. 유지관리비에 연간 1억원쯤 소요된다고 한다.

 

▲상산(象山)이라는 호를 갖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요.

 

"고등학교 은사 중에 시인 장순하 선생님이 계시는데 저를 물끄러니 보시더니 '자네 호를 상산이라 하게. 태인 근처 상두산(象頭山)의 가운데 자를 뺀 것이네' 하시면서 지어주셨습니다. 그 뒤 친구들이 반놀림으로 저를 상산이라 불렀지요. 학교 이름을 상산고로 정하면서 호를 버렸습니다. 학교 이름에 설립자의 이름이나 호를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선생님도 훗날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상산고가 1981년에 설립됐으니 올해로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애환도 많았을 법 합니다.

 

"개척자의 뼈저린 아픔을 맛보았고 시련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정당성을 짓밟으려는 사람들과 외롭게 싸워야 했고 당연한 권리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걸어 온 끝에 떳떳한 오늘을 맞게 되었지요."

 

▲2003년 자립형 사립학교 전환 이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도내 학생들이 입학하기엔 문턱이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

 

"첫 해 타 지역 학생 비율이 38%이던 것이 2006년엔 84%에 이르렀고 이대로 놔두었다간 90%를 훨씬 넘을 것 같아 2007학년도부터는 25%를 전북지역 학생을 뽑는 걸로 정했습니다. 고향에서 후학을 길러 보겠다는 당초의 제 뜻이 무너질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을 바라볼 때 뿌듯하시겠습니다.

 

"수도권 학생이 60%쯤 되고 제주와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돼 있습니다. 경상도에서도 우수 인재가 많이 오고 있어요. 교정에 울려퍼지는 팔도 사투리는 마치 천당의 화음처럼 들려요. 지역감정은 어른들에게나 있지 학생들 사이에는 전혀 없습니다."

 

▲타 지역 학생이 많은 걸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저는 학생들에게 '네가 몸담은 터전을 영화롭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지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좋은 감정을 갖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타 지역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말고 이 지역 학생과 똑같이 함께 안아야 할 것입니다. 전북발전은 이 고장에서 얼마나 훌륭한 인재를 많이 길러내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내신성적 때문에 입시스트레스가 클 것 같습니다. 일부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고요.

 

"어느 학부형이 이런 얘기를 해요. 어느 대학을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가 전국의 뛰어난 인재들과 3년 동안 뒹글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것 자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일이라고. 내신 문제는 대학마다 선발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아가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대학들이 내신 위주로만 뽑았다면 명문대학에 들어간 우리 학생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겁니다."

 

상산고는 올해 서울대 37명, 연세대 88명, 고려대 85명의 합격자를 냈고, 의·치·한의대에만 102명이 들어갔다

 

▲지난 4월27일 개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세계 속의 상산'을 강조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세계 곳곳에서 기둥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 매너리즘에 빠져선 안된다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전통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학교 문을 열 때 상산인들이 외쳤던 다짐이 있습니다. 전주 속의 상산, 한국 속의 상산을 뛰어 넘어 '세계 속의 상산'으로 우뚝 올라서자는 다짐이었지요. 세계 선진국들의 젊은이들 부럽지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생애에 튼튼한 발판만이라도 다져두었으면 해요."

 

▲투자인색, 부실운영 등으로 일부 사학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만, 상산고는 본보기가 될 정도로 대조적입니다. 기숙사, 체육관, 잔디구장, 강의동 등 계속 시설투자를 하시는데 지금까지 총 투자액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전체 사학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비리는 발본색원돼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학의 비리가 전체인 양 매도되고 침소봉대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드나들 때마다 '도둑놈' 생각을 할 텐데 그런 환경에서 교육이며 인성이 어떻게 길러지겠습니까."

 

상산고에 들어간 투자액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사학인 중에는 마음은 있지만 돈이 모자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어 돈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2003년 자립형 전환 이후에만 360억원이 투자됐고 2만여평의 학교부지와 10개 동의 시설을 건축했으니 대략 1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주변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학교 기숙사 증축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내게 무슨 일 있으면 이 돈으로 모두 결재하라'며 통 크게 통장을 내주셨다는 일화가 회자됩니다만.

 

"기자들이란, 어떻게 그런 일까지…(웃음) 경추에 이상이 있어 9시간 반 동안 대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는 입원 사실도 모를 때인데 학교운영비 20억원하고 건축비 잔금에 쓰라고 통장을 내준 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쓰지 맙시다."

 

▲이사장님과 수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고교생의 필독 참고서인 '수학의 정석' 얘기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수학의 정석'은 대학(서울대 수학과) 시절 고학(苦學)의 산물입니다. 등록금 책값 하숙비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처지였는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기존 참고서에 만족할 수 없었고 또 기왕이면 학생들에게 좋은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광화문의 외국서적 판매점을 뒤지거나,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수소문해서 수학 관련 자료를 모았습니다. 아이디어도 얻고 좋은 문제들을 모았지요.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로 주옥같은 많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대로 묻어두기가 아까워 책으로 엮어보자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지요."

 

▲1966년에 '수학의 정석'이 처음 나왔습니다. 성경책 다음의 베스트셀러라는데 지금까지 얼마나 팔렸을까요.

 

"올해가 발행 45돌입니다. 아마 4200만 권 쯤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개정작업을 하실 때 직접 저술하시나요. 책 뒷면에 '도운이 이창형, 홍재현'이라는 이름이 있던데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벽까지 원고를 쓰며 가다듬었습니다. 밥을 먹거나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문제카드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모은 자료(카드)가 서재에 가득하지요. 창형이는 사위이고, 재현(서울대 수학과 교수)이는 딸이지요. 둘은 서울대 수학과 동기생입니다. 개정판을 낼 때마다 사위와 딸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 덕분에 더욱 좋은 책이 된 듯하여 뿌듯합니다. "

 

'수학의 정석'은 교육과정 개편에 맞춰 5년 단위로 개편작업이 이뤄진다. 앞으로 훌륭한 필진을 찾아 딸 사위와 함께 개편 작업에 참여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수학의 정석'은 세대를 물린 창의적인 전수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수학의 달인' '수학의 신(神)'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인데 수학이란 한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굳이 말한다면 '논리력· 사고력을 기르는 가장 으뜸 학문이자 멋진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수학은 수를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수를 매개체로 논리력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고 또 모든 학문은 수학의 토대 없이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과거 '학교 세운 걸 후회한다'고 불만을 표출하셨습니다. 사립학교가 수조원의 국민 세금을 지원받는다면 정부의 규제와 간섭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과거엔 사립학교 수업료가 공립보다 많았지만 1974년 고교평준화 이후 사립의 수업료를 공립 수준으로 낮춰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원 처우개선, 물가인상 등 수업료 인상요인이 20% 이상 생기는 해도 있었지만 수업료 인상률은 번번이 5% 미만에 그쳤습니다. 그러니 사립은 수업료만으로는 인건비도 충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재정결함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정부의 책임으로 인해 생긴 재정결손을 정부가 매워주는 꼴이지요. 분명한 것은 보조금은 수업료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므로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지원이지 사학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업료 통제 대가로 보조금을 주면서 정부가 시혜자 행세를 하고 간섭하는 것은 가당치 않아요." 상산고는 이 보조금을 한푼도 받지 않고 있다.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을 놓고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만.

 

"이념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국경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수월성 교육이 필요하지요. 경쟁 없는 사회, 일등을 키워내지 못하는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원도 없는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인적자원뿐이지 않습니까. 수월성 교육은 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사회주의 평등사상을 중시했던 중국도 지금은 철저한 엘리트주의 교육을 하고 있어요."

 

▲얼마전 전북교육청과 전교조전북지부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사립교원 신규 임용 시 도교육청이 위탁받아 공개전형을 실시하거나 법인간 공동전형을 통하여 사립학교 교원을 임용하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노사협약은 노동자와 사용자간에 체결하는 것이고, 사립학교 교원의 임면권자(사용자)는 사학 이사장인데 왜 제3자인 교육청과 전교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요. 구속력이 없는 일을 왜 하는지…. 부질 없는 일이예요."

 

▲전국구 1번 제의 등 과거 정치권의 유혹을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만. 지금 그런 제의가 오더라도 같은 생각인가요.

 

"그동안 전국구뿐 아니라 국회의원 공천 유혹도 여러차례 받았지만 다 거부했습니다. 돈 벌고 명성 얻으면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딱해요. 인재들을 유혹해 놓고 망가뜨리는 정치권도 한심스럽고요. '수학의 정석'은 제 자식 같은 놈이지요. 제가 평생 쓰고 고치고 다듬어야 할 책입니다. 정치를 하면 책은 누가 씁니까. 도자기 굽는 사람은 좋은 작품으로,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수학 책을 쓰는 것으로 그 권위가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선진국 소릴 듣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은 다 이루셨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런 저런 꿈이 많았지요. 일흔이 넘었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봐요.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가도 '아, 시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상산고등학교가 젊은이들의 꿈의 동산이 되도록 마음을 쓰면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수학의 정석'도 독자들의 계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