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조선말 대학자 정교

전주서 '대한계년사' 집필…개화기 국학 연구의 거목…애국계몽 운동 앞장

정교가 살았던 전주시 완산동 413번지. 폐가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정확한 행정구역은 전주시 동완산동 413번지로 곤지산길 3길 6이다. (desk@jjan.kr)

정교(鄭喬·1856∼1925)는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다. 그는 개화기의 관료이자 지식인으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였고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이다. 한일병탄이 되자 모든 활동을 접고 낙향하여 지내다가 전주에서 거주하다 1925년 익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가 전주에서 국학 관련 연구를 계속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 정교는 누구인가

 

정교는 1856년 7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5년 3월 이리에서 생을 마쳤다. 본관은 하남이며 호는 추인(秋人)이다. 정교가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 모습과 교류한 인사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공부했는지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정교는 후리후리한 키에 가무스름한 얼굴은 좀 긴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짧게 깎은 머리에는 탕건(宕巾)을 쓰고 탕건에는 갓을 받쳐 쓴 풍채는 언뜻 보기에 시골 노인 같으나 빛나는 눈빛과 비범한 풍채는 노학자의 풍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정교의 첫 관직은 1894년 궁내부주사이다. 그 후 그는 1895년 4월 수원부 판관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7월 장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정교는 '박학호고(博學好古)', '독서지인(讀書之人)'으로 평가될 정도로 유학적 소양이 깊었다.

정교가 살았던 전주시 완산동 413번지 내부. (desk@jjan.kr)

 

그는 1898년 1월부터는 독립협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서기(書記), 제의(提議), 총대위원(摠代委員)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정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8년 8월에 독립협회의 사법위원(司法委員)이 되면서부터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상재, 이건호와 함께 중추원관제 개정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같은 해 11월 중추원관제 개정안을 반포하면서 정교를 비롯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는데 만민공동회의 투쟁 끝에 석방되었다.

 

정교는 1898년 12월 독립협회 해산 후 미국인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1899년 8월 배재학당으로 옮겨 1904년 1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정교는 1905년 10월 내부대신 이지용의 추천으로 제주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1906년 1월에는 학부 참서관이 되었고, 2월에는 외국어학교장을 겸하였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과 의견대립으로 곡산군수로 좌천되었다. 정교는 병이 있어 부임하지 못하다가 다음해인 1907년 5월 곡산에 도착하였으며 약 100여일이 지난 뒤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그후 관료로서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 정교, 전주에 자리를 잡다

 

정교가 1910년 이후 전주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작촌(鵲村) 조병희(趙炳喜, 1913-2003)의 '국학연구에 몰두한 추인 정교선생'(완산고을의 맥박, 1994)에서 확인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분노와 허탈감에 빠진 정교는 아들의 근무처인 전주 삼남은행이 있는 전주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노학자 추인 정교는 날마다 무엇인가 저술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전주 부중에서는 그가 무엇하는 사람이고,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전주에서 정교와 교류한 인사는 조병희의 부친 조춘원(趙春元)과 가람 이병기(李秉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교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여가만 생기면 정교를 찾아가 붓글씨를 영어로 배우는 한편 무엇인가 글을 받아쓰곤 하였다고 한다.

 

조병희의 부친과 가람 이병기는 정교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관계로 조병희는 그의 집에 심부름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조병희의 나이 열 한 살 되던 해인 1920년 여름 전주에 뜻하지 아니한 폭우로 전주천이 범람하게 되자, 서학동과 완산동의 천변지대는 침수되었다. 냇물이 빠지고 나서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때 조병희는 이질(痢疾)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였고 부친의 말씀에 따라 정교 문하에서 글(한문)을 익히는 한편 자잘한 일을 거들다가 6개월 뒤에 다시 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 '대한계년사'를 편찬한 정교

 

정교는 '대한계년사'를 비롯하여 국학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다. 역사서로는 '대동역사(大東歷史)', '남명강목(南明綱目)', '민회실기(民會實記)',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이 있으며,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에 국제법과 정당에 관한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대한계년사'는 독립협회나 개화기 역사인식을 다룰 때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의 편찬시기에 대해서 정교 자신이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시기적으로 가장 최근의 사건은 1913년 10월 손문(孫文)이 원세개(遠世凱)에 쫓겨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사건이다. 따라서 정교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한계년사'를 중점적으로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계년사'는 총 7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52년 고종의 탄생부터 1910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계년사'는 관보(官報), 각종 신문류 등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였으며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료를 충실하게 인용하였으며 3인칭 시점을 사용하고 자기의 의견이 다른 상소나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 솔직하고 신랄한 평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최근세사의 중요한 사료(史料)가 될 뿐만 아니라,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였으므로 이 방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정교와 '대한계년사'를 전북의 문화자산으로

 

정교는 개화기 관료이자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끊임없이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고 후에는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정교가 한일병탄 이후에 전주에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즉 개화기 국학의 대학자가 바로 전주에서 '대한계년사'를 비롯한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갔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전주에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학자 정교는 전주라는 공간에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소리 없이 역사를 정리하고 서술하는 작업을 묵묵히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전북의 문화자산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변주승 전주대 교수가 중심이 된 한국고전문화연구원에서 정교의 '대한계년사'의 전체를 번역 출판하였다는 것이다.

 

/ 이병규 문화전문시민기자(동학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