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전북 쌀이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소비자단체연합회가 주관한 '고품질 브랜드 쌀' 12개 중 5개가 선정됐을 때, 도민들은 "경기미에 밀렸던 전북 쌀이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환호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다.
시장에서 전북 쌀은 여전히 저가미로 인식되기 일쑤다.
자치단체마다 '대표 브랜드 쌀' 육성을 부르짖고 있지만, 정작 도내서 재배한 쌀은 타 시·도 브랜드로 둔갑,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RPC(Rice Processing Complex·미곡종합처리장)들은 농민들로부터 물량 확보에만 열을 올릴 뿐 계약 재배와 품종별 관리, 고가 브랜드 육성엔 미온적이다.
농민들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고, 일부는 외지 중개인에게 나락째 넘기기도 한다.
전북 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경쟁력을 키워야 할까.
(주)새만금농산 대표이자 농촌진흥청 명예연구관인 이익재 대표(52)에게 '전북 쌀의 오늘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6일 김제 죽산면 종신리 그의 회사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 전북 쌀의 현주소는.
현재 우리나라 전체 쌀 품질 수준은 일본과 비교해 80% 수준이다. 그 중 전북 쌀이 전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진다. 품질이 떨어져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품질은 괜찮지만, 유통에서 상당 부분 왜곡돼 있다.
도내엔 대형 소비처가 적어 쌀 물량의 60% 이상을 타 시·도로 반출할 수밖에 없다. 이 중 초저가 행사미로 80% 이상 나간다. 시장에선 여전히 '전북 쌀=저가미'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 전북도나 시·군 자치단체의 브랜드 쌀 육성 정책이나 지원 방식엔 문제점이 없나.
옛날에 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생산 쪽에 국한해 지원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사일로(silo·저장 탱크) 설치엔 예산을 지원하지만, 당장 안 드러나는 마케팅과 홍보 분야는 소홀하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경쟁력 있는 RPC엔 인센티브를 집중해야 한다. 나눠먹기식은 안 된다. 지원 후엔 어떤 영향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모니터링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RPC도 더 긴장하고, 책임감이 생긴다.
- 몇 년 전부터 전북 쌀은 '우수 브랜드 쌀'에 자주 이름을 올리지만, 실제 판매 실적으로 이어지진 않는 것 같다.
소비자들은 '우수 브랜드 쌀' 타이틀만 보고 사는 게 아니다. 도에서 몇 개의 샘플(sample·표본)만으로 '전북 쌀 전체가 우수하다'고 말하는 건 무리다.
자치단체마다 유통과 마케팅에 대한 콘셉트(concept·개념)도 바꿔야 한다. 소비자 기호나 유통 트렌드(trend·추세)에 대한 분석이 전혀 안 돼 있다. 쌀이 많은 것에 대해 천덕꾸러기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소비자 기호 패턴(pattern·유형)은 가격과 안정성으로 나뉜다. 한쪽에선 싸고 좋은 것을 찾고, 다른 쪽에선 안정성이 확보된 친환경 쌀을 찾는다. 저가 트렌드에 맞게 가되, 안정성을 확보한 쌀로 대도시나 학교 급식 등 특정 소비자를 공략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 대형 유통업체의 횡포도 전북 쌀이 고전하는 이유로 꼽힌다.
자본의 전횡은 비단 쌀 산업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다. 현재 국내 메이저 4개 유통업체(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농협 하나로마트)가 전체 쌀 물량의 60%를 독점하고 있다. 절대 수량을 대형 유통업체에 의존하다 보니, 이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최근엔 대형 할인점들이 중저가 자체 브랜드인 PL(Private Label)과 PB(Private Brand) 상품을 개발, 공급업체들을 찍어 누르려 하고 있다. 그나마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RPC 스스로 파워브랜드를 육성, 소비자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소비자 스스로 전북 쌀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경기도 여주 이천미나 철원 오대 쌀은 대형 유통업체에 종속이 안 된다.
- RPC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전북 쌀 경쟁력 강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쌀의 유통을 책임지는 RPC가 쥐고 있다. RPC가 파워 브랜드 육성을 전적으로 담당해 타 시·도에 원료로 팔지 말고, 브랜드 쌀로 판매해야 한다. 그러려면 철저한 농가 관리·토양 관리·품종 관리·계약 재배 관리를 하고 농법에 대한 매뉴얼을 개발해야 한다.
- 전북 쌀의 위상을 높이려면.
전북은 풍부한 토지·수량(水量)·일조(日照)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지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는 이미지로 선택하고, 평소 구매하는 브랜드를 재구매한다.
행정이나 RPC에선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다. 삼성과 SK, LG는 그 자체가 브랜드 아닌가. '전북 하면 쌀'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무엇보다 농가·RPC·행정이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농가는 내가 소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안전하고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RPC는 농가들이 최적의 쌀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적정한 가격을 책정, 수익이 생기면 농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행정은 생산뿐 아니라 가공과 유통, 마케팅 쪽에도 관심을 갖고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농협 RPC와 민간 RPC가 서로의 특징과 장점을 공유, 상호 보완하는 분업 체제도 하나의 대안이다.
조직과 시설, 자금 면에서 민간보다 우세한 농협은 원료를 수집·저장·보관·관리하는 데 장점이 많다. 민간 RPC는 유통과 마케팅에 대한 노하우와 수십 년간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농협은 생산과 수매에, 민간은 가공과 유통에 집중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RPC끼리 연계하면 불필요한 출혈을 막을 수 있다. 그 과실은 결국 RPC뿐 아니라 소비자와 농민에게 돌아간다.
- 최근 미 의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이 통과됐다. 정부는 쌀 시장 개방을 시간 문제로 보는 듯하다. 어떻게 보나.
쌀 시장은 2014년이면 개방한다. 이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협약 사항으로 법적 마지노선이다. 과거엔 수입 쌀이 우리 쌀 가격의 3분의 1이었다. 지금은 곡물 가격이 폭등해 노(no) 관세로 들어오더라도 국내 쌀 가격의 80~90%에 육박한다. 이런 마당에 국내 소비자는 가격 높은 외국 쌀을 찾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 쌀 자급률은 매년 95%, 105%에 이른다. 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내년이라도 당장 개방하자는 분위기다. 농민들은 보상 대책 없이 개방하는 것을 반대한다.
쌀은 식량 안보 차원에서 적정 면적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재고가 있어야 인도적 원조나 대북 지원도 가능하다. 일기 불순 등 기후 변화에 따른 흉년도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최하 90만㏊는 쌀 경지 면적을 유지해야 한다. 도로 건설이나 농지 개발 등 자연적 감소만으로 충분한데, 당장 풍년이 들어 쌀이 남았다고 해서 논에 대체작물 재배를 유도하는 등 인위적으로 (쌀 경지 면적을) 줄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