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전 총재는

고난 딛고 한국 경제계 큰 별로…‘소형차’ 타는 ‘큰 인물’

가난했던 시절 대학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룬 뒤 대통령 경제수석(1988년)과 건설부장관(89년), 한국은행 총재(2002년) 등 학계와 관계, 금융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이 됐다.

 

유지경성(有志竟成).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고사성어는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누구한테나 일생에 세번쯤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박 전 총재한테도 세번의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것이 첫번째이고 한국은행에 입행한 것이 두번째, 미국 유학이 세번째 기회였다.

 

한국은행 근무 시절 학술연수생으로 선발돼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수(중앙대 경제학과·76년)의 꿈을 이루는 전환점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고 후진국 경제발전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마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역저를 꼽으라면 ‘경제발전론’이다. 두차례 개정판이 나와 지금도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키워드는 고난이다. ‘고난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큰 길과 기회를 제공한다’고 회고록에서 썼다. 한국일보에 기고한 연재물(2009.7∼2010.11) 제목도 ‘고난 속에 큰 기회 있다’였다. 어려웠던 시절 그는 하늘을 보고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다짐하면서 자신을 추스렸다. 그래서 회고록 제목도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로 정했다.

 

어릴 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온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일기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맨손체조 하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을 쓰는 데도 일기가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경제전문가이자 한국경제발전의 산증인이지만, 삶의 궤적과 철학을 들여다보면 그는 꼭 이 시대의 선비라는 생각이 든다. 카리스마 넘치는 열강,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성품, 자신과 가족한테 엄격하지만 이웃에게는 따뜻한 성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마음가짐 등이 그런 일면이다.

 

한국은행 총재 시절 연봉의 20%를 떼내 고향 김제의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 학교지역, 소년원 등 복지시설에 보탰다. 드러내지 않고 지금도 남을 돕고 있다. 건설부장관 7개월 재직중 공식적인 대외활동비로는 턱 없이 부족해 2000여만 원을 사비로 충당했다. 남한테 손 벌리지 않은 탓이다. 사후에 장기기증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나이가 많아 안구만 가능하다고 해서 서울대병원에 안구기증을 등록해 놓았다.

 

서울대 상대 동기 모임(350여명) 때 아반떼를 타고 갔더니 동기생들이 쇼크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성공했다, 잘 나갔다’던 사람이 소형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때 자가운전으로 청와대를 들어가는 위원은 박 총재가 유일하다고 한다.

 

부인 권영하여사는 두살 아래다. 익산 양조장 집 딸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왔다. 당시 김제군 백구면 제내리에서 이리공고로 기차통학을 할 때 수도 없이 오갔던 그 집 딸이지만 당시엔 부부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각각 KDI정책대학원 교수와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고 사위들은 강원대 교수와 (주)유니레버 상무, 포항공대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