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부안지역은 옛부터 도자기를 빚고 유통하는데 필요한 3박자를 모두 갖춘 곳이다. 풍부한 땔감과 좋은 흙, 이를 운반할 바닷길이 그것이다.

 

부안은 우선 변산반도를 끼고 있어 나무가 풍부했다. 고려 중엽의 대문호 이규보는 1199년 전주 사록(司錄)겸 서기로 부임, 1년 4개월을 전주에서 보냈다. 이 기간 중 벌목사(伐木使)로 변산반도에 들렀고, 그 때 이 곳을 ‘나라의 재목창고’라 표현했다. 그 만큼 수목이 울창했다는 뜻이다.

 

또한 부안지역은 도자기를 빚는데 필수적인 좋은 흙이 있었다. 흔히 고령토라 부르는 태토(바탕흙)는 일반 흙과 다르다. 끈적거리는 점성(粘性)과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가소성(可塑性)이 뛰어나야 한다. 이들 흙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보안면 유천리와 우동리, 진서면 진서리 등에 널리 분포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회백색을 띠는 가장 양질의 태토가 묻혀 있는 곳이 지난 4월 부안 청자박물관이 들어선 유천리 일대다.

 

그리고 부안은 고대부터 한·중·일 해상루트를 잇는 기항지였다. 중국 남쪽과 아시아 남방의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격포의 죽막동 해양제사유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해상교통로를 통해 개경으로 공납되었다.

 

이같은 3박자에다 탁월한 도공의 예술혼이 불어 넣어져 부안의 고려청자가 탄생한 것이다. 도자기의 형태나 문양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김종운 박사(부안군청 문화재전문위원)는 그 시기를 1270-1320년대로 보고 있다.

 

부안 유천리 가마터는 1929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됐으며 일부가 국보로 지정됐다. 또 유천리 청자는 2002년 비안도 앞바다에서 3000여 점이 인양돼, 천년 신비의 얼굴을 드러냈다.

 

700여 년전 줄포만 일대를 상상해 보라. 줄포만을 중심으로 고창과 부안일대가 도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도요가 즐비한 산업단지였다는 사실을…. 그 청자들은 왕실이나 귀족관료, 사찰 등에서 귀하게 대접받았다. 나아가 중국황실과 일본, 대만, 실크로드를 건너 이란까지 퍼져 나갔다.

 

부안 청자는 고려 내내 청자를 생산했던 전남 강진과 비교해 너무 소홀한 느낌이다. 최정상급 자리에 올랐다 홀연히 사라진 스타와도 같았던 부안청자에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