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 ‘저무는 가을’은 이렇게 나아간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 벼 이삭 수수 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그림자도 바쁜듯이 가누나. 무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주고 젖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줄을 모르네”.
가을을 소재로 한 유럽의 명시(名詩)들은 우울한 이미지를 띠고 있는 반면에 우리의 가을시(詩)들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정서는 대부분 그들이 놓여진 자연환경을 닮아간다. 고위도(高緯度) 지방인 유럽에 있어 생존을 위협하는 그 지루하고 혹독한 겨울의 전주곡인 가을은 그들에게 있어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그래서 가을은 인생에다 비유하면 중노인(中老人)이요 하루에 비유하면 석양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최후의 만찬이다. 방향으로 치면 가을은 해저문 서쪽이요 빛깔로 비유하면 하얀빛, 맛으로 치면 떫은맛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우울한 이미지의 가을을 계절의 범주속에 넣기를 꺼려했으며 되도록 소외시키려고 했다는것이다.
완연한 가을인 10월 중순경을 ‘리틀 섬머’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그만 여름’이라는 뜻이다. 11월 초순을 ‘ 올 해로운 섬머’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중순경을 ‘성(聖 ) 마틴의 섬머’로 불러 가을을 여름 호칭에 묶어 두어 가을을 계절에서 왕따시켰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14세기까지만 해도 한해를 여름과 겨울 두 계절로 나누었을 뿐이다.
가을이라는 단어는 ‘초서’라는 문인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그러나 가을은 한국이 위치한 풍토대에 자리잡은 소수의 나라에게만 주어진 신(神)의 혜택인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은 사철가운데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할퀴고 발기고 해도 가을만은 제자리에 두어주십시오….”라고 노산(鷺山) 이은상씨가 읊었던것이다. 그래서도 가을이 점점 짧아져 가는것이 아쉽다.
/장세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