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볼펜이 갑자기 사라졌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아닐수없다.방송중 큐시트에 곡목을 적어 나가던 중이었다. 분명히 나 혼자 책상에서 일하고 있었고 누가 다녀간 적도없는데 갑자기 볼펜이 사라진 것이다. 의자 옆, 책상 아래 모퉁이, 근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볼펜은 없다. 손에서 힘이 빠진다. 제갈공명의 백우선이나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손오공이 여의봉을 잃은 것처럼 맥이 풀리면서 급기야 의욕상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필통을 뒤적여본다. 다른 종류의 볼펜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내 손가락 사이에서 뇌와 혼연일체가 되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볼펜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 없다. 몇 주 전부터 두어 건의 기획 작업을 그 친구와 함께 하던 터라 내 영혼의 일부가 그 볼펜에 배어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컴퓨터가 중요한 일을 처리해주고 키보드 자판이 생각을 더 빨리 정리해주긴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은 신체의 일부와 같다. 종이에 부드럽게 말려드는 접촉감, 머리와 손과 종이와 펜이 서로 애무하다 급기야 혼연일체 되어 전개해 나가는 추진력. 그리고 지우고 다시 써가며 결국 마침표를 찍을 때의 쾌감이란! 키보드로 화면을 채워가는 그것과 확연히 다를 것이다.
서랍을 뒤적여본다. 다 쓴 펜이 한 움큼 잡힌다. 그때그때 중요한 일거리들을 훌륭하게 수행한 충실한 벗들이다. 내면의 내장을 토해 혈서를 남기고 장렬히 순직한 펜의 주검 앞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다.
지난해까지 자주 사용하던 펜은 1.0㎜ 수성펜이었다. 투명 케이스 안으로 검정 심이 팍팍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대단한 업무가 진전되는 양 위안을 삼았다. 종이에 ‘앵기는’ 감촉도 보드라웠다. 생각이 술술 잘 풀려서 좋았다. 방송관련 상을 받은 어느 해, 대학교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은사님은 수상 기념으로 근사한 선물을 사주시겠다고 기어이 문방구로 이끄셨다. ‘이 문방구에 있는 것 중 가장 좋고 비싼 것을 내어 놓으라’고 주문하시는데 내가 선택한 펜은 역시 1200원짜리 1.0㎜ 수성 펜. 큰맘 먹고 좋은 펜을 사주시려는 은사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손에 익은 펜이 내 생각을 먼저 알았다. 비싼 것과 1200원짜리 사이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을 때, 문구점 주인은 자기 이익은 생각지도 않고 슬며시 내 편을 거드는 것이었다. “교수님, 김 피디님은 이 펜을 좋아하세요. 제가 잘 알아요.” 문구점 주인까지 가세하여 1200원짜리 펜으로 낙점. 교수님은 매우 아쉬워하시며 대신 펜을 20여개나 사주셨다. 서랍 속에서 다 쓴 1200원짜리 1.0㎜ 수성펜 십여 개를 보니 은사님의 깊은 사랑이 전해진다.
중간 중간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인 들이 유명 메이커의 펜을 선물해주었는데 딱히 ‘필 꽂히는’ 펜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조용히 필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펜이 막히거나 잉크가 말라비틀어져 그대로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요즘은 다시 1.0㎜ 볼펜을 쓰고 있다. 가격은 다소 올라 1500원쯤 하려나? ‘떼굴떼굴’ 볼펜심이 잘도 굴러간다. 생각도 ‘떼굴떼굴’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이 친구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벌써 십여 개째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한창 가속이 붙을 무렵, 그만 이 친구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십만 원에서 백여만 원에 이르는 명품 펜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1500원짜리 볼펜 하나 잃어버리고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명품 펜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아니다. 친구를 어찌 가격에 비유한단 말인가. 내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사라져서 일손이 잡히지 않을 따름. 마음이 허전하다.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