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를 바라보며

김관식 전주 자인산부인과 원장

나무가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는 이 시기에는 문득 생각에 골똘해지게 된다. 나무들이 각자 대지 위에 의탁한 몸을 공손히 하고 바람의 힘을 빌려 말을 건네오면 마음 속의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나무는 열매나 잎을 통해 자신의 일부를 돌려줄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 알고 우리를 앞질러 가며 생각을 채근하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현대의 삶은 겉보기에 화려하며 풍요로워 보이나 내면은 오히려 궁핍하고 얕아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인의 삶을 점점 더 가파르게 만들고 내면을 궁박하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이 사람사이에 얽혀있는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므로서 비롯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이든 물질이든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현대인은 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받아내야 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에 보다 익숙하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하는 데 상대를 위한 배려보다 이해타산에 따른 판단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이해관계를 떠나더라도 상대방의 사람됨을 이해하는 것은 관계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 이해가 충분하지 않을 때 또는 단편적으로만 바라보았을 때 오해나 피해를 부르기도하고 관계가 망가지기도 한다. 필자 역시 사람의 됨됨이를 이해하는데 서툴러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경우가 있었으며 필자가 판단대상이 되어 실망을 준 적이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다듬어야 할 것이라고 나무는 이 계절에 필자에게 말을 건넨다.

 

예로부터 흔히 인물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었다. 이는 과거 당나라에서 인재선발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사람의 풍모, 언변, 필적 그리고 문리를 이른다. 즉 용모가 단정하고 건강한 신체, 조리있고 정직한 언변, 곱고 품격있는 서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판단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외모지상주의의 성형열풍과 사회 곳곳의 늘어가는 막말, 온오프라인에서 쉽게 눈에 띄는 독필이나 자신에 대한 과대 또는 허위포장 등은 현명한 판단을 하기에 어려움을 더해주고 있다.

 

많은 것이 변화된 오늘날에 과거의 가치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나 그 순서나 범주를 고려하여 다듬어 받아들인다면 자신을 비춰보는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에 힘쓰며 주위를 내 안에 들여 찬찬히 들여다보면 추구할 바가 분명해진다. 좋은 뜻을 주위와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수단으로 글을 삼는다면 불필요한 말은 멀어지며 편안하고 품위있는 용모가 이뤄질 것이다. 용모의 수려함이 아니라 깊은 내면이 우려내는 사람의 직관적 인상을 ‘참’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참한 사람인가 또는 적어도 참해지려고 노력은 하는 사람인가.

 

가로수의 안내를 받으며 방문한 전주향교에는 고옥과 어울어진 은행나무가 반기고 있다. 필자는 수백년 세월의 아득한 풍모를 간직한 은행나무가 바람을 빌려 건네는 말을 듣고 그 잎새와 열매가 전해주는 뜻을 읽는다. 나무는 시대와 세상의 것을 평가하지 않았고 다만 전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며 되돌려주는 때를 스스로 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