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글

정전(단편소설)

▲ 오하경(전주 근영여고 1학년)
“야, 팽이 치자는데 어데 가노? 삼동아!”남자애들과 노는 것은 항상 재미없었다. 여자애들 멱 감는 것을 훔쳐보거나 나뭇가지를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 따위는 더욱 관심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풀밭에 누워 혼자 사색에 잠기는 편이 좋았다. 나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냥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집에 혼자 계실 어머니에게 드릴 꽃도 꺾을 겸, 마을 어귀의 동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동산 위에는 꽃이 만발했다. 가을기운이 스며들어 풀과 나무의 초록빛은 덜했지만, 대신 어머니가 좋아하는 들국화가 동산 가득 만개해있었다. 허리 숙여 들국화를 꺾고 있노라니,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자 얼른 고목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로 올라가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뭇잎 사이에 숨어있으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기에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이곳에 올라오고는 했다. 튼튼한 가지를 찾아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 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밑을 내려다보니, 마을 입구에서 용달차가 덜덜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워낙 산골이라 사람들이 좀체 찾지 않는 곳인데 누가 이사를 왔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벌써 노란 물감이 번진 하늘을 보니 다시 어머니 생각이 났다. 들국화를 한 다발 손에 쥐어들고 집으로 향했다.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집에 도착하자 아까 보았던 용달차가 세워져 있었다.

 

“어무이! 내 왔데이. 어무이 좋아하는 들국화도 꺾어왔데이.”

 

“왔나. 와 이렇게 늦었노, 걱정된다 안카나.”

 

나는 들국화를 받아들고 들어가려는 어머니에게 얼른 물어보았다.

 

“근데 저 차는 뭐꼬?”“옆집에 이사 왔데이. 아도 있는 것 같든데 사우지 말고 잘 지내야한디.”옆집을 슬쩍 훔쳐보았다. 어수선한 마루 위에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짐을 옮기고 있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여느 때처럼 나무 위에 누워있었다.

 

“거기서 뭐해?”

 

그 때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빼꼼히 내다보니 옆집에 이사 온 여자아이였다. 혼자 있는 시간을 뺏겼다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나무에서 내려와 여자아이를 지나쳤다. 순간 손목을 잡혔다. 여자애는 떨어진 들국화를 주워 내게 건넸다. 그 아이는 손이 스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들국화 좋아해?”

 

“……우리 어무이가 좋아한데이.”

 

“너희 어머니는 들국화를 왜 좋아하시니? 다른 예쁜 꽃들 많은데.”

 

언젠가 어머니는 내게 들국화에 대해서 말해주셨다. 삼동아, 들국화 꽃말이 뭔지 아나? 모른데이, 들국화 꽃말이 장애라고도 하고 기적이라고도 한다는데 우리도 언젠간 기적이 오겠제? 그 말을 하던 어머니의 눈이 참으로 슬퍼보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가 미웠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그저 돈 벌러 가신 줄 알았지만, 다 커버린 지금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음을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밉다.

 

“어머 얘, 들국화를 짓이기면 어떡하니? 암튼 이 꽃 갖다드리면 어머니가 기뻐하시겠다. 아버지는 안 드리니?”

 

“아부지는 우릴 버렸데이.”

 

여자아이는 순간 멈칫하더니 금세 들국화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돌아가셨어, 사고로. 서울서 번듯하게 살았는데, 이젠 쫄딱 망했지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 네 아버지는 널 아주 안 찾으시니?”“종종 선물을 보내곤 한데이. 그래도 다 필요없데이. 이젠 아부지라고도 안부를끼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기는 싫었기에 여자 아이를 뒤로하고 뜀박질을 했다.

 

 

그 뒤로도 우린 자주 만났다. 집도 가깝거니와, 무엇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 애가 고마웠다. 그 날도 여자애의 손을 잡고 동산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삼동이 어디에 숨겼어? 당신은 애 키울 자격 없어. 내 자식 내가 키워야겠어, 우리 애 어디 있냐고!”

 

대문 앞의 승용차 한 대와 안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가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 보니 남자의 손이 어머니를 향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우리 어무이한티 이러지 마라! 하지 말란 말이다!”남자를 향해 악을 썼다.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나를 붙잡고 쪼그려 앉았다. 남자의 낯선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삼동아, 아빠야. 이젠 아무 걱정 없다.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도 가졌고, 널 잘 돌봐줄 사람도 있단다. 아빠랑 같이 가자, 응?”

 

남자는 싫다는 나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이끌었다.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광이 나는 승용차 앞에 다다르자, 여자애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여자애의 얼굴이 사라지고 차에 태워졌다. 눈을 감았다. 여자애와 어머니, 그리고 들국화가 겹쳐보였다. 기적은 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