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잘살기를 바라고, 과거보다 현재가 더 풍족하며 시대 또한 20세기에서 밀레니엄 21세기로 넘어왔다. 그런데 신 빈곤층, 절대적 빈곤층, 상대적 빈곤층, 근로빈곤층 등 빈곤층을 나타내는 용어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왜 그런 걸까? 분명 정부는 꾸준히 빈곤층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의 결과에 따라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게다가 그 정책들이란 소위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물론 IMF등과 같은 변수들이 영향을 미친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의 저소득층·빈곤층의 보호정책이 너무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리고 최저생계비나 다른 지원 등 을 부족하지 않게 해주기에는 정부의 재정적인 능력도 문제가 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처럼 많은 재원을 쏟을 만큼 잘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에 반대하여 김대중 정부 때부터 생산적 복지를 목표로 한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생산적 복지는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복지를 말한다. 일(work)과 복지(welfare)의 합성어로 ‘welfare to work’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들, 소외계층은 늘어만 가는 걸까?
과연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당장의 의식주 해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런 의문이 들은 배경에는 ‘희망의 인문학’이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은 정신적 요소보다는 당장의 물질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문학은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이 가난함을 부유함으로 바꿔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 이 책에서 보면 인문학은 빈곤층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대학에 진학하고 좀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가지게 되고 하는 건 표면적인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변화이며, 성과는 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인 것 같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순 없지만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배우며 이야기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인문학 수업들을 통해 사람들은 당장의 의식주 해결 보다는 더 큰 무언가를 꿈꾸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이런 인문학 교육을 활용하면 변화가 일어날까. 교육은 이 사회에서 맡은 바 책임이 있다.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교육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서 과연 교육의 역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교육은 사람들에게 주는 ‘기회’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나는 빈곤층에게 필요한건 쌀보다도, 직업보다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선 먹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살아가는지 알고 자신이 나아갈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정표를 세우는데 인문학이 큰 도움을 줄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문학, 교육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사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빈곤층 사람들이 아마 지금까지 하루하루 일해 왔던 이유는 오늘의 점심, 당장의 공과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살아갈 때는 희망이 없는 삶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육은 좀 더 세상을 넓게 그리고 멀리 보는 안목을 키워주어 삶의 목표를 찾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렇듯 넓게는 교육, 좁게는 인문학을 통해서 삶의 큰 목표와 자존감을 얻은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은 ‘희망’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전주교대 실과교육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