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사람보다 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실 3면이 책으로 가득했다. 서재는 물론이고 주방, 자녀들 방까지 48평 아파트가 온통 책으로 꽉 차 있었다. 1만 몇천권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66평 아파트에 사는 까닭을 3만권이 넘는 책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벌레였다. 정규 학력으로는 초등학교(중·고는 검정고시) 다닌 게 전부였고 집안은 가난했다. 사업에 실패한 부친은 나중엔 술과 도박에 쪄들었고 모친은 옷장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느라 중소도시를 떠돌았다. 할머니 밑에서 성장한 그에게 책은 유일한 낙이었다. 외로움을 혼자 즐기는 법을 책을 통해 일찍부터 터득한 셈이다.
그는 "어린 날을 회상하면 온통 슬픔 뿐이지만 책을 읽을 때만은 행복했다."고 어느 책에선가 썼다. 그 시절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황금기,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을 제공한 시기였다.
어릴 적 그의 별명은 '미리박사'였다. 교과서를 나눠주면 이틀만에 섭렵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는 게 많았던 그를 '미리박사'라고 불렀다.
월급을 타 본 것은 군대 있을 때 한 번뿐이다. 이등병 월급 690원, 병장 때 2400원을 받았다. 690원을 받으면 당시 200원 짜리 삼중당 문고 3권을 사고 90원은 라면 같은 걸 샀다. 군대를 제대한 뒤 제주도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삶이 힘들었을 때 제주항이 바라보이는 사라봉에서 몇 번이나 뛰어내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면서 민주화운동의 길을 걸었고 광주항쟁과 동학혁명, 우리의 대동사상에 관심을 갖고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책으로 출간했다. 한국의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우리나라의 옛길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른 산이 400여개에 이른다.
직업 한번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한테는 수많은 직업 형용사가 따라 붙는다. 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 독립저술가, 문화운동가, 향토사학자, 우리땅 걷기 전도사, 걷기 도사, 길 전문가 등등.
그는 왜 그토록 끝없이 걷는 걸까. 그의 삶의 화두는 길과 강, 책이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택한 방법은 책과 함께 느리게 우리나라의 산천을 걷는 일뿐이었다. 길 위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배웠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명제다. 그도 이젠 쉰일곱이다. 앞으로도 이 두가지를 빼놓고는 그의 여생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진안 백운면이 고향이다. 얼굴은 텁텁한 인상이라 두주불사형 막걸리 타입이지만 주량은 고작 소주 두잔이다. 부인 오현신 여사(51)와 2남1녀를 두었다. 84년 연애결혼했다. 둘째 아들은 한국전통문화고를 나와 한국교원대 미술교육과 4학년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천을 답사했고 졸업 후에는 우리나라의 옛길을 그림으로 표현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저서로 '신정일의 신 택리지' '느리게 걷는 사람'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똑바로 살아라'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섬진강 따라 걷기' '풍류' '낙동강' '영산강'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금강' '섬진강'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가슴 설레는 걷기여행' '신정일의 암자 가는 길'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우리 역사 속의 천재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