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작가회의(회장 안도현)가 2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옆 원두막에서 올 3차 세미나로'전북의 근현대 문학인'을 꺼냈다. 1차 세미나가 신진연구자들에 의해 꾸려졌고, 2차 세미나가 중견연구자로 진행됐다면, 이날 세미나는 그 결산의 자리였다. 세미나는 오하근 교수(원광대)의 기조강연과 원로시인 정양 교수(우석대)가 좌장으로 참여해 난상토론으로 진행됐다.
오 교수는 이날 '전북의 근현대 문학인'을 주제로, 1920년대 근대문학의 초창기부터 1940년 해방공간까지 전북문인들의 한국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었는지 살폈다. 이를 요약한다.
전북인으로 초창기 현대문학 대열에 참여한 이는 유엽(1902~1975, 전주)이다.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중 같은 문과생인 손진태 양주동 등과 함께 동인지 '금성'을 창간했다. 출가해 승려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작품은 불교의 선을 시에서 구현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36세로 요절한 소설가 이익상(1895~1930, 전주)은 계급주의 단체인 파스쿨라와 카프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신경향파 작가로 활약했다. 보통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소설가 백주 김태수와 시인 신석정이 그의 제자다.
백주 김태수(1904~1982, 부안)는 소설'과부'가 이광수에 의해'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1924년) 데뷔했다. 그의 작품 '구두장이'는 진정한 신경향파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살인미수범의 고백'은 최초의 목적소설로 여겨진다.
김창술(1903~1950, 전주) 역시 1920년대 카프에 가입해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시를 썼다. 북한에서 이상화·김소월 등과 함께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전주시회(詩會)'를 조직해 이끌었다.
김해강(1903~1987, 전주) 시인은 19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회에 '새날의 기원'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으며, 웅장한 남성적인 말투와 태양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써 '태양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1892~1968, 익산)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서울대와 전북대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김상옥 등 유수한 시조시인을 등단시켰다. 시조에서 한문 투의 상투어가 사라지고 고유어의 뉘앙스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가람의 덕분이다.
시조 시인 양상경(1903~1988, 김제) 역시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데뷔했으며, 민족적 염원을 담은 시를 많이 발표했다.
1930년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동인지 '시문학'에 시인 신석정(1907~1974, 부안)이 참여했다. 박한영 스님 밑에서 불경을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목가적인 시를 써 전원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주고와 전북대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전북문단의 기반을 닦았다.
잘 알려진 미당 서정주(1915~2000, 고창)와 백릉 채만식(1902~1950, 군산)도 1930년대 한국문단을 살찌우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성범(1916~1981, 고창)은 미당과 같은 시문학 동인이며, 외교관과 바둑 프로기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소설가 이근영(1909~?, 군산)은 1946년 조선문학가 동맹의 농민문학위원회 사무장을 맡다가 그 해 월북했으며, 월북 후 80년대 초까지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전북의 아동문학은 김완동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30년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로 당선돼 데뷔했다. 근래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김환태(1909~1944, 무주)와 윤선규(1908~?, 남원)는 30년대 후반 국내 대표적 평론가로 평가받는다.
전주 해성학교 교장과 대구매일신문 사장을 역임한 최민순(1912~1975, 진안)은 가톨릭 신부이면서 시인이다. 1960년 한국펜클럽번역상을 수상했다.
1940년대 좌우 대립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대표적 인물이 유진오(1922~1950, 완주 고산)다. 시 낭독에 뛰어나 동대문운동장의 10만 관중 앞에서 시를 낭독해 갈채를 받았다. 1949년 지리산 문화공작대장으로 임명된 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