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부모로 교사로 살아가는 현실이 불안하고 가슴 아픈 시대가 되었다. 내가 양육하는 아이들과 가르치는 아이들이 눈앞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신문을 들출 때마다, 인터넷을 켤 때마다 머리기사로 학교폭력과 자살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며, 책임은 누가 져야 하고, 대책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연일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다. 그 사이에 또 한 아이가, 먼저 보낸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경찰서에 드나들며 조서를 작성했던 충격 사이에서 고민하다 우리 곁을 떠났다.
정부에서 발표되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대책 5개년 계획의 실효성을 따지는 것도, 국회의원들이 학교폭력 실태를 조사하여 발표하는 것도, 교육청에서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각종 연수와 예방교육 시키는 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청소년들의 폭력과 이어지는 자살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각종 대책이 폭력을 저지르거나 당하는 아이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음지에서 자행되던 폭력이 이제 버젓이 교실에서, 거리에서, 열린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은 폭력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대다수의 학생들에게까지도 공포감으로 작용한다.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 앞에서, 부모 앞에서 당당히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학교폭력의 대책으로 교권 회복을 들먹이는 일이 오히려 교사를 위축시킨다는 사실을 당국자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학생들의 인권을 앞세워 교사들에게 면박을 주었던 그들이 다시 핏대를 올려 교권을 운운하는 것은 '병주고 약주는' 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교사들을 우습게 보는 사회, 교사를 얕잡아 보는 부모,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당국자들의 영향으로 학생들도 교사를 쉽사리 대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 이렇게 과격해졌나 싶을 만큼 사용하는 말투에서도, 행동하는 모습에서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물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서도,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시대나 학교 폭력이 없었던 적이 있었으랴마는 최근의 상황은 그 형태가 좀 더 거침이 없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과거에는 적어도 교사를 포함한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 제법 예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그 단적인 예로 지나가던 어르신이 청소년들의 비행을 지팡이로 지도했던 것은 기성세대가 느끼는 향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들에겐 그러한 예의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원인은 '관계성'의 무너짐 때문으로 이해된다. 권위의 유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성'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느끼면서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가르침으로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사와 제자의 관계를 가르침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친구 관계는 누가 알려 주었을까? 사랑을 배운다고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성'의 해결은 학교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한 법률로 처벌을 강화하면 더욱 강한 반향이 나타날 수 있음을 왜 모를까? 분명한 것은 학교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가정에서부터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관계'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학교는 가정의 1차적 관계 그 다음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군사부일체'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교사들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지도해야 하는 당위성을 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내 아이도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학력을 학교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꼽는 사람도, 인성지도가 학교의 진정한 목표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생존을 위한 산업 인력을 길러내기 위해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목 놓아 부르짖는 사람이라도 최근 벌어지는 학교폭력과 자살 사건 앞에서는 내 살을 도려내는 듯, 창자를 끊어내는 듯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지향이나 목표도 아이의 삶을, 아이의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송이 같은 아이들이 연거푸 생명을 내던지는 상황에서 교사된 자로서 아비된 자로서 가슴이 먹먹하고 한없이 슬픈 것은 어찌 나 뿐이겠는가?
떠나간 아이들을 비롯하여 앞으로 내가 가르쳐야 할 수많은 아이들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 아이들이 내게 폭력을 행사해서도 아니요, 내가 그들에게 폭군처럼 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교사와 학생의 인간적 관계가 적대적인 것처럼 비쳐지는 사회가 원망스럽고, 모든 학교에 모든 학생들 사이에 위계가 있고 '일진'이 판치는 것처럼 이해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다.
개학을 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또 새로운 아이들 앞에 교사와 학생으로 마주 서야 할 터인데, 다시금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존중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대화의 상대로 인내하며 서 있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아이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어줄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 가슴 아픈 청소년들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겠다. 그러면 우리들의 관계가 좀 나아지겠지.
방극남(김제 금성여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