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가위로 양철을 잘라서 장난감 호루라기를 만들어 불고 다닌 경험은 있었지만, 내가 호루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영어교과서에 나오는 'WHISTLE'이라는 글을 배우면서 호루라기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밴자민 프렝클린은 자기 친구들이 불고 다니는 호루라기가 몹시 부러웠다. 어느 날 용돈이 생기자 호루라기를 사서 온 집 안을 신나게 불고 돌아다녔다. 형이 시끄럽다고 만류했지만 계속 불고 다녔다. 그러자 화가 난 형이 호루라기를 빼앗아 부수어 버렸다.
형의 폭거에 분함을 참지 못한 프렝클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 그런데 그때 자기가 형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은 호루라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호루라기는 타인의 행동을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비싸게 샀다고 후회했다. 그때 평생 자기 생활의 좌우명이 된「Don't pay too much for the whistle.」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가격과 가치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지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멈추라는 뜻이 내포된 경구였다.
내가 호루라기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축구심판을 보면서부터였다. 반칙을 범한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격렬하게 다투던 선수들도 나의 호루라기소리 한 방이면 끝났다. 경기장 안에서 주심 호루라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심판을 마치고 본부석으로 갔을 때였다. 선배 한 분이 옆으로 오더니 주심의 호루라기소리가 본부석에서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작다고 지적해주었다. 선수들이 내 호루라기소리를 듣고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고 말했지만, 주심의 호루라기소리는 선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중들에게도 필요하단다. 호루라기소리를 듣고 주심의 판정에 관심을 가질 때 관람질서도 확립되고 관중들은 경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난 온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호루라기를 힘껏 불었다.
요즘 잇단 학생들의 자살로 학생생활지도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원인이 집단따돌림과 학교폭력이라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만한 뾰족한 해법은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 해결책으로 호루라기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나도 호루라기를 잘 활용하면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된다.
학교폭력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 전체의 문제다. 학생들은 비겁쟁이로 낙인찍힐 두려움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도 선생이나 부모에게 숨긴다. 또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도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고 방관자가 된다. 학교폭력은 무기력하고 비겁한 방관자들 때문에 만연되는 범죄다.
그런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실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학생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현장을 목격하고도 외면하는 무기력한 비겁자가 되지 말고, 목격할 때마다 용기를 가지고 적극 대처하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의 용기 말이다. 자기가 외면하면 대신에 다른 친구가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모두 용기를 가지고 적극 대응하면 학교폭력은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본다. 그때 필요한 것이 호루라기다.
폭력현장을 목격한 학생이 호루라기를 불면 가해학생은 행동을 주춤한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면 꽁무니를 뺀다. 또 현장에 모인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 호루라기를 분다고 상상해 보라. 기대되는 호루라기의 효과이다. 그러나 호루라기를 불 학생들의 용기가 관건이다. 교사 학부모 그리고 사회가 삼위일체가 되어 학생들에게 호루라기를 불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치안이 취약한 곳에 위치한 남녀공학고등학교 학생주임으로 근무할 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여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호루라기를 사용토록 한 경험이 있었다. 여학생들은 모두 목에 호루라기를 걸고 다녔다. 축구심판을 통해서 얻은 경험으로 취한 조처였다.
* 수필가 이희근 씨는 2009년 <문학사랑> 에서 등단, 수필집 「산에 올라가 봐야」가 있다. 문학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