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못하고 죽어 한(恨)이 맺히면 어떻게 될까? 처녀 귀신, 총각 귀신이 된다. 눈에 안 띄는 단역만 평생 하다 죽게 되면? 이 작품에 따르면 배우 귀신이 된다.
우진문화공간이 기획한 세번째 '젊은 연출가전'에 초대된 ST99(예술감독 박병도)의 '분장실'(연출 류성목·25일 오후 7시)에는 배우 귀신이 등장한다. 일본의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원작을 각색한 이 작품은 다소 기괴한 설정이지만 때론 가볍고 경쾌하게, 때론 진지하면서도 묵직하게 희노애락의 변주를 풀어냈다.
작품은 체홉의 '갈매기'에서 주인공 니나를 맡은 배우 C(김그린 역)의 분장실에서 시작된다. 세계 2차대전 전·후 프롬프터(prompter·연극 무대 뒷쪽에서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 등을 대신해주는 사람)를 하면서 단역으로 출연하다 죽은 뒤 분장실에 사는 두 귀신(이란호·박현미 역)이 살고 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단역 배우 D(전성은 역)는 C에게 니나역을 달라고 조르다 병에 맞아 귀신이 돼 분장실을 다시 찾는다.
귀신 배우들은 배우C가 나간 분장실에서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배역을 연기한다. '맥베드' '갈매기'의 명대사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그저 소리로만 울린다. 배우를 갈망하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처로움이 들다가도 계속되는 장면에서 다소의 지루함이 드는 이유다.
"여배우 20년, 멋으로 나이 먹는 게 아니야. 머리카락 구멍에서 서서히 피가 솟구치는 느낌. 나 수십 번이나 그런 쓰라림을 맛봤어. 상대를 치느냐, 자기가 죽느냐야…. 너 인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화장실에서 틀어박혀 혼자 밤새 5~6시간. 그래 축적. 똥같은 축적."
배우 C의 처절한 독백은 시련이 가득했던 연기생활과 배역에 대한 무서우리만큼의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꿈을 잃은 우리들에게 "네 인생은 잘 굴러가냐"며 송곳 같은 질문을 던진다. 죽은 영혼이 이승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귀신 배우들이 굳세게 살아가자며 서로를 끌어안는 마지막 장면은 '하루하루 떠밀려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서슬 퍼런 죽비 같다. 류성목씨의 연출력, 네 여배우의 앙상블이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