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무슨 무슨 문학상, 문학(시)비에 이어 '문학관' 도 전국적으로 70여 개가 소개되고 있다. 모두가 나름의 명분을 띠고 있겠지만, 특히 문학관의 경우 적어도 100여 년 후까지를 내다보는 문학사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근대문학사가 작품보다 차라리 작가를 더 중시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난세에 한 시인 작가가 당대 대중들과 어떻게 호흡해왔고, 어떤 희망을 주었던가 하는 정신주의 극점,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적 영원성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들은 추상적이 아닌 문학관 내부에서 유작, 유품, 연구성과 등이 가시화 돼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획력이다. 문학관은 박물관과는 달리 당해 시인. 자가의 지고한 업적을 어떻게 재조명하고 그 동력을 어떻게 전형화(典型化)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바 이가 곧 기획력이다.
그동안 비교적 넉넉지 않은 자료와 비좁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 특히 젊은층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최명희 문학관의 저력이 바로 이 탁월한 기획력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이런 면에서 문학관 운영 주체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어떤 문학관은 개관식이 끝남과 동시에 후속 예산도 소홀해져 개점 휴업, 즉 일과성 성과주의에 머물러 버린 곳도 있다. 문학관은 생태학적으로 연구하고 채우는 지속 발전형이어야 한다.
요즈음 야구장을 보면 그 옛날엔 보이지 않던 여성 팬들로 가득하다. 그처럼, 전문 문인, 혹은 문학 애호가들이나 즐겨찾던 문학관도 이제는 누구랄 것 없이 줄을 잇는 문화적 보편화, 교양화로 확산된 이 때 문화가치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문학관의 존재의의가 더욱 명료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