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뭐 뀌고 성 낸다'는 비아냥도 비슷한 용례(用例)다. 이 속담에 딱 들어맞는 코미디 한 편이 엊그제 국회에서 연출됐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얘기다. 그가 지난주 국회에 나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2010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해 해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근래 이 사건이 대통령 측근의 권력비리 의혹으로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 관계자로는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기 때문에 시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사찰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자신이 파기하도록 지시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드디어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가는 의미있는 고백으로 들렸다. 그런데 그가 회견장에서 보인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한 마디로 '뭣 뀌고 성내는' 꼴이었다.
이 전 비서관은 회견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파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내가 몸통입니다. 책임 지겠습니다"라고. 마치 '그러니 어쩔 것이냐'고 대드는듯한 저돌적인 자세였다. 자신이 취한 조치는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지기 위한 충정때문이었다는 듣기 거북한 궤변을 늘어 놓기도 했다. 과오를 사과하기는 커녕 TV 시청자를 향해 호통을 치고 민주당을 훈계하는듯한 이런 돌출 행동에 기자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오죽했으면 그 순간 회견장 한 쪽에서 "쇼 하지마"란 야유가 다 터져 나왔을까. 한마디로 이날 회견은 이 전 비서관의 억지·오만·둘러대기 '원맨 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돈을 받은 당사자나 야권이 '소가 웃을 일'이라고 독설을 퍼붓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자들의 질문도 외면한채 회견장을 내빼듯이 빠져나가다가 기자들에 쫓겨 도로 한 복판에서 넘어지기까지 한 추태는 옮기고 싶지도 않다.
이 전 비서관은 이 날 회견에서 은폐를 위해 하드디스크 파기를 지시한 사실 외에 제기된 모든 의혹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다만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준 2000만원은 선의(善意)였다는 주장이고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윗 선은 없다고만 거듭 강조했다. 불법 사찰이란 말 자체도 민주통합당의 음모요 정치공작이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이런 뒤집어 쓰기(?) 악역(惡役) 자처는 어찌보면 의리를 앞세운 조폭 세계의 어두운 단면을 보는듯 해 입맛이 쓰다.
어쨌거나 그가 은폐의 주범이라고 스스로 밝혔으므로 이제 공은 검찰 쪽으로 넘어간 셈이다. 검찰이 철저히 수사해서 밝혀 내야할 의혹은 한 둘이 아니다. 우선 파기된 하드디스크에는 민간인 뿐 아니라 정계·재계·언론계 등 사회 각계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시중에 파다하다. 2010년 수사에서 윗 선을 밝혀내지 못하고 수사를 중단한 것에 대한 의구심도 여전하다. 하필 총선을 앞둔 이 시점에 이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이 정치적 공작일 수 있다는 의문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전 비서관이 몸통을 자처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그 판도라 상자를 여는 일이야말로 이 사건 수사의 핵심이다. 검찰이 지난주부터 이영호 전 비서관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개인 컴퓨터와 관련 서류 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 갔으므로 조만간 사건의 실체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설마 또다시 짜맞추기식 수사로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이야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