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과 한식을 지나 자연은 완연한 봄을 이루고 있으나 내 몸의 절기는 가을로 들어서고 있다. 육체가 전해오는 기미들에서 먼저 계절을 느끼는 요즈음, 내 머리만 해도 잎 지기 시작하는 나무 같다. 이러 저러한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내게 온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없겠다. 느닷없다고도, 황당하다고도 할 수 없겠다. 죽음에 대해 사고함으로써 몇 미터 더 이어질 삶의 끈이 견고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할 것이므로, 책이 '죽음'에 관한 내용만을 '수용'했어도 충분히 의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고통을 기록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아우슈비츠, 생명과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된 도살장, 개인의 자아가 끝내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녁으로 먹는 수프 그릇을 들고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있는 동료들에게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고 말하는 사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라고 감탄하는 영혼을 아우슈비츠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같은 환경에서도 삶과 죽음이 나눠지는 것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돼지처럼 행동할 때 성자처럼 행동하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도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간직할 수 있음을 저자는 확인한다.
이런 관찰을 토대로 그는 '로고테라피' 혹은 '빈 제3정신의학파'라 불리는 이론을 정착시킨다. 이 책의 2부에서 서술한 로고테라피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는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게 함으로써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
이 책에 의하면 인생의 농부인 나에게 가을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저자의 말처럼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기보다는 한 번쯤은 삶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질문해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데에 마음을 주어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면, 나의 영혼이 조금 더 깨끗해질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이 들거나 죽음의 고통속에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저자가 체험한 것과 비슷한 체념상태를 가진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이 책은 위로해 줄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우울증, 중독증, 공격성의 원인이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의미 없음' 혹은 실존적 공허에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독일어 원제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네 : 한 심리학자가 수용소를 경험하다'였는데, 영어로 번역할 때 'Ma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로 바뀌었다. 내가 읽은 책은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시형이 옮기고 청하출판사에서 2005년 초판 2쇄로 펴낸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책은 6년을 기다렸다 생의 가을을 맞은 내 가슴으로 들어와 삶의 의미를 속삭인 것이다.
△오창렬 시인은 1999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서로 따뜻하다」가 있다. 현재 상산고 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