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한국영화의 고향이다. 1950-60년대, 서울 충무로와 함께 지방으로는 유일하게 전주에서 영화가 제작됐다.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피아골'과 '아리랑'이 만들어졌고 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와 '애정산맥''성벽을 뚫고''애수의 남행열차''붉은 깃발을 들어라' 등 당대의 흥행작 여러 편이 이곳에서 제작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주의 영화역사는 오랫동안 기억되지 못했다.
잊혔던 영화사를 되살리고 기록으로 만들어 우리 앞에 내놓은 사람이 영화인 탁광선생(1923-1999, 본명 탁형연)이다. 전북영화사의 산증인이었던 선생은 생전에 그 누구보다도 50-60년대 화려했던 전주영화의 부활을 갈망했다. 들여다보면 전주국제영화제가 만들어진 바탕에도 선생의 지치지 않는 열망과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직후 경찰에 투신했던 선생은 전주경찰서 후생극장인 백도극장 지배인을 맡으면서 영화기획, 제작, 극장경영은 물론 무대사회자와 심지어 변사로까지 활동했다. 1953년에는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영화제작에도 나섰다. 당시 전북에서의 영화제작 여건은 척박했지만 전북의 영화인들은 열정으로 뭉쳐 16㎜ 극영화를 만들어냈고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여럿이었다. '선화공주'며 '피아골' 등 수편의 영화 제작 현장 중심에는 언제나 선생이 있었다. 영화 말고도 이 지역 문화예술 안팎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영원한 영화인'이 앞세워졌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선생은 부산과 부천에서 국제영화제가 만들어져 영화문화가 새롭게 꽃피우고 있는 것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늘 전주가 다시 한 번 한국영화의 꿈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전주영화제가 개최된다고 했을 때는 "큰 꿈이 이제야 이루어졌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선생은 전주영화제를 바로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이 들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던 선생은 말년, 기억을 더듬어 전북의 영화사를 구술과 기록으로 남겼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빛바랜 사진과 가장자리 다 닳아진 포스터도 함께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