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나면 자주 가 보던 금강변이 망가졌다. 흙먼지 뒤집어 쓴 트럭들이 웅포 긴 다리 밑을 부지런히 오간다. 덕지덕지 피곤에 쌓인 덤프트럭 기사들의 얼굴이 역역하다. 밤낮 없이 파고 나르는 강행군이 남루했었다. 그게 그의 끼니였으나 파고들면 강은 절규하고 흙탕물을 게워내며 쿨럭이는 것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금강이 가까이에서 망가진 모습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감은 눈에 떠오른 비단강둑을 오래오래 지켜본다.
생각에 지친 나를 위무하던 강이다. 번잡한 생각을 도닥이며 키워주고도 그런 내색은 모르는 강이었다. 조약돌을 집어 던지면 수면에 코를 박던 물수제비를 띄워주며 '심심하냐.'고 묻고 깡충깡충 튕겨주다 잦아들던 강이다. 갈잎 배를 띄우면 묵묵히 흘러 빨래하는 아낙 곁을 주춤거리다 방망이 끝에 튀는 땟물을 싣고 가던 강이다. 혼자 가다 심심하면 구비 도는 여울 곁에서 휘어지게 진양조로 한 곡을 뽑고 흘러가다 섭섭하면 여울져 맴 돌아 들던 강이다.
흐름뿐이랴. 넘치면서 쌓이고 쌓이면서 갈리어 무게를 덜고 그 무게의 틈에 모래무지를 길러 함께 사는 지혜를 가르치던 강이다.
강마을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랜 흰 돛배의 새우젓을 이야기한다. 포구 마을 너머로 지는 석양을 등에 진 발길에서 흘러내린 그물자락의 노을이 지등(紙燈)처럼 옛 나루를 밝혀든다. 군산포를 거슬러 강바람을 가르며 갱갱이포(강경)에 이르는 길고 먼 옛 굽이의 소금 배에는 생선과 함께 쌀이 실려 나가고 실려 오던 밥의 이야기가 주절댄다.
흐른다고 다 눈물이랴. 백제 유민 6만이 노예로 실려 갈 때에도 금강은 울면서 울지 않으면서 삼킨 눈물은 넘쳐 황산들의 너른 벼를 알게 모르게 키웠다. 그 강이, 그렇게 천년을 흘러 만년을 이을 그 강이, 울면서 울지 않던 그 금강이 누더기로 뜯기고 할퀴었다.
흐른다고 다 강이랴. 곧장 흘러 바다로 가는 그런 강은 강이 아니다. 구비 돌아 아우르며 끼고도는 푸른 들에는 풀을 뜯고 이삭을 쪼고 뽀뿌라 그늘 아래 웃음이 깃들어야 한다. 멱 감으며 등을 밀다 주춤주춤 손 흔드는 한낮이 길게 누어 흘러야 한다.
강에 기댄 목숨들이 거덜 나는 데 하느님은 말이 없다. 요단강도 파헤치자고 덤벼들 저 굴삭기 앞에 내 기도는 응답이 없다. 십자가는 말이 없다. 파지마라, 자르지 마라, 매달리며 응석 부리고 떼를 쓰며 기댄 기도가 민망하였다.공양미 3백석을 마련하여 눈먼 세상을 수술하고 싶었다.
엇 그제는 누런 모래 둔이 사라졌다. 어제는 두루미가 옛 나루 구비에서 전세방을 뺐다. 강둑에 쌓이던 초록의 장한 노래의 음표가 오늘은 물결의 오선지를 떠난다. 내일은 다함없던 흙탕물의 함성이 도란도란 강톱에 쌓아올린 이야기도 쓸어버릴 것이다.
죽음이 강을 거덜 내 버렸다. 마저 죽기를 기다려 수륙재를 준비해야하나. '원 왕생'(願 往生)을 외우며 극락을 비는 내 무딘 독경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어른이 된 소년의 꿈이 어머니의 강을 윤간해 버렸다. 저 큰 삽의 뚱한 표정이, 덤덤한 무감각이, 참으로 보기 흉하다.
조금 남은 맑은 물을 손으로 찍어본다. 차다. 내가 조금 젖어있을 때 강은 더 깊이 젖어 밑으로만 나를 대신하여 흐르며 위로하고 '하늘의 새끼 구름을 바라보라'고 다독여주었다.
울면서 낮게 외우던 강의 긴 '옴' 소리를 나는 듣는다. 저 때의 냉이 꽃은, 강둑의 어린 칡소는 다 안다. 끌러가던 백제유민의 아픈 눈물을 기억한다.
한 번 더 비단물결을 헤적여 찍어 강의 남은 체온을 재어본다. 아직 살아 있다. 곡신(谷神)이 성나기 전에 차떼기 하듯 삼백 석을 마련하고 싶다. 눈먼 소년의 눈을 수술하여 주기 위해 삼백 석을 마련해야겠다. 물위에 '삼백 석!'을 쓰고 어음으로 달아 놓는다. 물결이 어음을 들고 세차게 달려간다. 풀기 없는 내 문장이 메아리를 못 지어 구만리 하늘을 에둘러 맴 돌더라도 강가에 나아가 강물에 어음 쓰는 필법을 터득하고 말겠다. 굽이치는 필법은 살아있음이 아니냐. 살아있음은 아름다움이 아니냐.
나는 벌떡 일어나 강가로 내닫는다. 맹렬한 삶의 의욕에 넘친다. 오늘도 강가에 나아가 젖지 말자, 젖지 말자, 하면서 흠뻑 젖어 돌아온다. 망가진 대지의 자궁을 안쓰럽게 바라보면 나약하나 나의 기도는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비단강(錦江)의 비단 물결은 눈을 뜨고 보여야 한다.
*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