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집에 가서 만조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있는 용조 형에게, 지금 아내와 딸이 고추를 심겠다고 밭을 일군다고 하니 절대 눈길도 주지 말고 어떤 경우라도 들여다보지 말 것이며 절대 말도 걸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내와 딸이 괭이질을 했다. 먼지가 풀풀 일었지만 제대로 땅이 파질리 없다. 딸이 언제 괭이자루를 손에 잡고 땅에 허리를 굽혀봤어야 말이지. 아내는 그래도 제법 땅을 판다. 그들을 놀리다가 하도 답답하여 내가 땅을 몇 삽 질러보았다. 내가 땅을 파는 것을 보고 아내와 딸이 "오! 농분데, 농부" 한다. 그렇게 채소를 심을 땅을 다 팠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이 두 인간들이 어떻게 고추이랑과 고랑을 만들 것이며, 어떻게 이랑 위에 비닐을 씌운단 말인가.
그들의 막막한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만조형님과 용조형이 나타나 내 옆에 서서 둘이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절대 간섭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답답해하던 용조형이 드디어 괭이를 손에 들고 만다. 한때는 우리들이 뛰어 놀던 작은 집 마당에 바람과 햇살이 가득하다. 산천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나와 아내와 딸과 만조형은 고랑을 타 가는 용조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 햇살이 반백이 된 형의 머리와 허리와 팔 굽에서 빛났다. 앞 산 참나무 잎이 뿌옇게 뒤집어진다. 마을 뒤에 있는 오래 된 귀목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햇살을 쏟아내고 어디선가 쑥국새가 운다. 곧 오동 꽃이 피고 꾀꼬리가 울고 감자 싹이 나리라.
용조 형이 가만 가만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어쩌면 저렇게 힘을 하나도 안 들이고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천천히 차근차근 느리고 부드럽게 유연한 몸짓으로 흙을 다룬단 말인가. 손에 잡힌 괭이자루에서부터 흙을 파 올리는 괭이 끝과 산천이 형의 지휘를 따른다. 형의 지휘에 따라 한고랑 두 고랑 이랑과 고랑이 생겨난다. 아니 그려진다. 잡초가 자라던 맨땅에 놀랍게도 금세 비닐을 씌운 두어 평 채소밭이 창조(?)되었다. 우리 주위의 풍경이 달라졌다. "어쩌면, 어쩌면 세상에 어쩌면……"아내와 딸의 입에서는 그냥 "예술이다 예술. 어쩌면, 어쩌면…… 저렇게 힘 하나 안 들이고"를 연발한다.
그렇다 힘이다. 옛날 내가 괭이질을 하고 호미질을 할 때 아버님은 늘 힘을 빼야 한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 모를 심을 때도 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도 거름을 뿌릴 때도 늘 힘을 빼라.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했다. 모든 일에 힘을 빼라. 힘이란 또 다른 욕심이다. 사심이다.
힘이 들어간 모든 인간 행위는 새로운 생명력을 창조할 수 없다. 보라. 새 잎 핀 저 버드나무실가지에 쏟아진 햇살과 바람을. 힘을 빼라. 바람을 거스르지 말라. 예술이, 교육이, 정치가 저기 저 세상에 따로 있지 않다. 봄바람에 몸을 맡긴 풀잎과 괭이자루를 들고 땅을 파는 농부들의 저 몸짓을 보라. 자연의 질서와 순리와 순환을 따르는 농부들이 창조해 내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와 연대와 조화를 이룬 논과 밭을 보라. 작품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당신의 봄을 그려가는 붓이다. 그러니 힘 빼라. /본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