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아침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KBS TV소설 '복희누나'였다. 눈길을 끄는 톱스타도 없고 자극적인 이야기나 볼거리도 드러나지 않는 이 드라마에 마음이 끌려 '다시보기'를 그렇게 즐겨하게 될 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11월 10%대의 시청률로 출발했던'복희누나'는 16%대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렸고, 평균 14%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아침드라마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통상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게 되는 아침드라마의 행진 속에서 이 드라마가 단연 돋보이는 이유가 그래서 궁금했는데, 이 드라마를 쓴 작가 '이금림'이란 이름을 보고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 끄덕여졌다. 요즈음의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즘과 삶의 진정성을 갖고 나선 작가라면 '이금림'을 우선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문학적 서정성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미가 넘쳐나는 '복희누나'는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복희'와 여러 인물들이 빚어내는 휴머니즘과 애환, 성장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공간의 배경이 진안과 전주여서 이 지역 시청자들에게는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덤으로 주었던 드라마다.
드라마 작가 이금림씨(64)를 만났다. '복희누나' 종영 하루 전날이었다.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면서 "인간 밑바닥의 진정성을 그린다면 특별한 설정 없이도 충분히 재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그는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수도,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좋은 드라마를 써야 한다는 의식을 늘 지키게 했다고 말했다.
감각적인 설정 대신 삶의 진정성을 담은 탄탄한 이야기로 30여년동안 시청자들을 드라마로 울고 웃게 했던 그는 나이와 관계없이 소녀처럼 밝았다. 한때 사경을 해맬 정도로 마음병이 깊어 몸까지 지쳐있었다는 그를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적인 이야기부터 드라마 제작에 얽힌 이면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드라마 못지않게 재미있었지만 아쉽게도 공개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꽤 있다.
그는 지난 2월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당초 의지가 없었던 그에게 이 자리를 강권한 것은 선후배들이다. 임기 4년 동안 그가 할 일은 방송작가들의 권익을 찾는 일이다. 그는 다소 버겁다고 했지만 30여년 걸어온 길에서 얻은 명예를 이 기회에 제대로 갚을 생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무에 대한 의지가 돋보였다. 역시 그의 빛나는 삶의 무기는 매사에 새롭게 충전되는 진정성이었다.
-건강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사경을 헤맸을 정도로 심각했어요. 벌써 2년 전이군요. 40일 동안 한숨도 못자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
-방영 중이던 드라마 집필을 중단 하는 사태까지 갈 정도였죠. 당시 언론 보도로는 다시는 이금림표 드라마를 볼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4-5개월 꼬박 병상에서 지내다 떨쳐 일어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하품 해보는 것, 눈물 흘리며 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잠을 못자는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면벽 수도한 스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약과였죠.(웃음)"
-활동을 재개한 후 첫 드라마가 '복희누나'군요. 저도 팬이었습니다. 방송 시간대가 출근시간이어서 '다시보기'를 해야 했지만 진안 전주 등 우리 지역이 공간적 배경이어서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드라마 대사에 '전북일보'도 나왔죠. 전주를 떠올리며 쓴 부분이 많아요. 고향 분들에게는 좀 더 친근했을 겁니다. 드라마 작가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제 고향이 전북이라는 것이에요. 아마 그쪽이 아니었으면 그런 드라마 못썼겠지요."
-익숙한 지명 때문에 드라마 내용을 실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안 쪽에 그런 이름을 가진 양조장이 있었다고도 하던데요.
"뜻밖인데요. 사실 드라마 속 양조장 배경은 충북 진천의 덕산 양조장 이예요. 작품을 준비할 때 인터넷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양조장을 찾아보니까 덕산양조장이 뜨더라고요. 1929년에 공장을 만들어서 사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곳인데 거기 찾아가 그 분들을 만나고 난 다음 이야기가 구체화 되었습니다. 공간만 제 고향으로 가져온 것이죠."
-배경이 어떻든 요즈음 그런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흥분하지 않아도 되고, 인간적인 따뜻함과 희망을 만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참 고마운 일인데 사실은 걱정스러웠어요. 이 드라마가 좀 위선적인 면이 있잖아요. 이렇게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만 사는 집단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판타지를 꼭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착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배려할 수도 있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현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보다 더 끔찍한 경우가 많잖아요."
-배우 캐스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십니까.
"그렇긴 한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출연 배우 캐스팅은 드라마 제작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이 점에서 한계가 있어요. 이 드라마에서는 몇 명 중진 원로 배우 말고 젊은 배우들 모두 신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극이 잘 살아났으니 감사한 일이죠."
-이 드라마가 주목 받은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유명스타가 나와야 드라마가 잘된다거나 그래야만 시청률을 잡고 간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 드라마가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고 감동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시청률이 꼭 스타시스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어요. '다시보기'를 가장 많이 하는 드라마였다고 하는데 젊은 세대들도 이 드라마를 알고 있는 것이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시고 결국 돌아오신 곳이 또 드라마를 쓰는 일인데요. 어떤 동력이 있나 봅니다.
"작가는 정년이 없잖아요. 행복한 직업이죠. 저는 저희 선배님들이 아직도 현장에 계신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김수현 박정란 선생님 같은 분들을 보면 계속 글을 쓰시는 것도 그렇지만 활동도 아주 왕성하잖아요. 그러니 저같은 사람이 아직 일하는 것은 그냥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좀 무례한 표현인데, 어떤 분이'언제 적 이금림이냐'며 그런데 지금도 우리가 이금림 드라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80년에 첫 드라마를 썼으니 만 32년이군요. 다른 직종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실증이 날만하지만, 드라마는 늘 다른 이야기로 다른 배우, 다른 스텝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새롭습니다. 그런 특징이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외부적인 요인일거예요."
-그런데 다시 시작하시면서 왜 굳이 시대극, 가족 드라마 장르를 선택하셨습니까. 요즈음 트렌드로 보면 위험하지 않나요.
"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언어특위'라는 곳에서 2년 동안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니 드라마가 경계해야 할 비판 대상인 '막장'요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이 아침드라마였어요. 처음에는 아침드라마를 안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송사에 아침드라마로 꼭 하려면 없어진'TV소설'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방송사 측과 약속을 했죠. 시청률로 스트레스 주지 말 것과 그 대신 저는 막장 코드를 빼고 좋은 드라마를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장 코드라는 것이 불륜, 원한과 복수, 출생의 비밀, 비정상적으로 비꼬인 가족 관계 같은 것들이잖아요. 환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거런것 빼고도 과연 드라마가 될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되었잖아요."
-선생님께서는 '막장 코드'나 감각적인 소재와 주제로부터 늘 자유로우셨나요.
"저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푸른안개'예요. 불륜을 미화시켰다고 해서 지탄을 받고 논쟁도 뜨거웠죠. 저는 불륜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강변했지만 주부 시청자들이 우리집에 쳐들어와서 '폭탄 던지겠다'고 했을 정도로 비난이 거셌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드라마는 어떤 것들입니까.
"휴머니티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따뜻한 사랑을 담아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죠. 사실 막장의 요소를 없애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그런 요소들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드라마에 좋은 요소로 작용하게 해서 볼만한 드라마로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현실 속 이야기라면 빼거나 피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끌어가는 일이 중요하겠죠."
-최명희 선생님 이야기를 빼놓고 갈 수 없겠습니다. 최선생님과는 아주 절친한 친구셨죠.
"'은실이'를 쓰고 있을 때 명희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 때 드라마 속 인물 작명이 끝나서 전화를 했는데 명희가 안 어울린다며 다른 성을 붙여주었어요. 그때 명희는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죠. 혼수상태에 그 극심한 고통에…….(결국 그는 눈물을 흘렸다.) '혼불' 10권을 완성시키고 난 직후 인터뷰와 강연으로 너무 바빴어요.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죠. 이후 2년 투병하는 동안 최명희는 정말 위대했습니다. 어떤 환자도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갔어요."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리우신가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작품을 쓸 때면 어디까지 썼는지, 어디서 막혔는지,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하다보면 답이 나왔거든요. 글 쓰는 작업이 외로운 일이잖아요. 장르는 달랐지만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희망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고독한 사람이 저기 또 하나 있어서 불을 밝히고 잠을 안자면서 쓰고 있구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요. 답답하고 글이 안 풀어질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 친구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어요."
-드라마 작가로 살아오시는 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요. 특히 가정일과 병행하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드라마 좀 쓴답시고 가족과 주위사람들이 희생해야 했습니다. 집안 일을 잘 건사하면서 내 일도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다행히 애들은 알아서 잘 커주었고, 남편은 지방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부담을 덜어주었죠. 부모나 내 형제한테도 제대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 나이가 되었더군요. 아프면서 많은 회한이 듭니다."
-글쓰기가 외로운 일이라고 하셨는데, 마음병도 그런 것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치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병원을 많이 다녔는데 결국은 마음이 치유되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스승이 법륜스님이신데 스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음공부를 하고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불교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었어요.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나누는 일이 도움이 되었죠. 저도 모르는 내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 있던 것들이 쌓여서 불면의 시간을 보낸 것인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이번 작품을 쓰는 마음 상태로 오기까지는 그런 시간이 있었던 덕분이죠."
-30여년 걸어오신 드라마 작가로서의 삶의 가치는 드라마의 시대적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과장된 해석인지 모르겠는데 드라마는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바꿀 수 있지요. 드라마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한자리에 같은 시간에 천만 명을 모아놓을 수 있겠어요. 드라마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드라마가 오락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못지않게 진정성과 감동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복희누나' 를 마치고 두달 정도 쉬고 싶다는 그는 여유를 갖고 작품 준비를 할 생각이다. "어떤 여건이 되던 이런 결심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는 찬찬히 준비하며 쓰게 될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했다. 지친 사람들에게 사랑과 위안의 손을 내밀어 끝내 희망을 갖게 하는 이금림표 드라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