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 "시인은 시대와 긴장감 놓지 않아야… 고행의 시간 필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교육 계획 세워야 / 놀이문화는 아이들 창의력 교육에 가장 중요 / 낙후된 전북문화예술정책 새롭게 혁신해야

▲ 김용택 시인은 교직 은퇴 이후'제 2의 청춘'을 구가하며 신바람 난 생활을 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거침이 없었다. 예전의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니었다. 말발이며 글발이 경지에 오른 듯했다. 그의 말에선 몽고 기병의 말발굽 소리가 났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향해 거침없이 내닫는 모습이었다. 시와 산문에 날개가 달렸고, 우리 교육에 대한 소신이 칼날 같았다. 정치와 사회를 보는 눈도 명쾌했다. 때론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는 요즘 38년간 몸 담았던 교직을 떠난 후 신바람 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밀려드는 강연요청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고, 글에도 청춘의 기운이 실렸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맑은 웃음 속에는 섬진강 물이 흐르고 진메마을을 스치는 바람이 일었다. 국민시인이자 국민강사로 제2의 삶을 사는 김용택 시인(64)을 그의 전주 자택으로 찾았다. 인터뷰는 창문 밖으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SK뷰 아파트 2층 서재에서 2시간가량 이어졌다.

 

- 요즘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방송 출연도 잦고, 강의도 많이 나가시고…

 

"저도 깜작 놀랐는데 방송 섭외가 많이 들어옵니다. KBS '한국의 재발견' 프로를 1년간 맡았고, SBS '물은 생명이다(도랑 살리기)'를 10월까지 매주 찍고 있습니다. 또 교육방송(EBS)도 6월부터 10회 학교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습니다."

 

- 강연도 한 달에 20번 이상 나간다고 들었는데요?

 

"강연 요청을 거의 감당하지 못합니다. 10월까지는 거의 짜여 있습니다. 4, 5월 달에는 20번도 더 했죠. 서울 같은데는 하루에 3군데를 맞추어 갈 때도 있고, 2군데는 보통이고요. 예전에 초등학교 출퇴근 할 때 수업 일수와 거의 비슷하게(웃음)."

 

- 아, 참 축하드려야겠습니다. 6월 2일 시상하는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셨던데요. 수상작이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촬영' 등 5편이던데, 어디에 실린 작품인가요?

 

"창비에 실린 것 같아요. 새로 쓰는 섬진강 연작 중에 하나죠. 제가 2002년도에 본격적인 시집을 내고 그 이후 헤맸죠. 제대로 된 시집을 못냈고 제대로 된 시가 쓰여지지 않았죠. 왜냐면 고향에 대한 상실과, 상실의 아픔이 너무 커서 10년간 본격적인 시를 못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 1월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죠. 섬진강 연작을 19편 정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중 몇편을 여기저기 문학잡지에 발표를 했죠. 그동안 제가 써왔던 시들과는 다른 시들을 쓰고 있는데, 거의 시집으로 한 권 정리가 될 것 같아요."

 

- 책 제목은 정해 놨습니까?

 

"제목을 정해 놨는데, 그 책은 자본의 횡포, 자본에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처절함, 자본과의 대결, 그런 이야기죠. 그동안에 섬진강이라는 가냘프고 서정적인 어떤 그 강이 남해로 스며들었다고 하면, 이번에 섬진강 시집은 남해로 가지 않고 도시로 가는, 사람들을 향해 흘러가는 그런 아픔, 자본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그런 어떤 고통들이 주조를 이르고 있다고 봐야죠. 그래서 그 글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시가 젊어졌다, 청춘이다, 무모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집 안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새로 나온 '김용택의 어머니'란 책이 눈에 띠던데요. 어머님의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아주 안좋으십니다. 지금은 병원에 주로 계시고…. 제가 처음 어머니 책을 내려고 할 때는 굉장히 꺼렸습니다."

 

- 왜요?

 

"사진을 찍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1980년 후반부터 섬진강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 사진들을 찍다가 어느 날, 어머니를 찍은 거예요. 어머니가 한 일흔 살쯤 되셨을 땐 것 같애요. 어머니 사진을 찍어서 사진집을 내자, 그래서 난 어머니 책을 낼 수 없다, 우리 어머닌데, 어떻게 내가 어머니에 대해서 쓸 수가 있느냐. 자식들은 다 불효막심한 놈들인데, 작년에 또 책을 내자고 하면서 이 사람이 출판사에 그 사진집을 갔다 줬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잘 살고 많이 배운 사람들 책은 많아요. 아들 딸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의 어머니에 관한, 그런 책이 있어요. 근데 정말 일제 식민지 시대때 태어나서 6·25 전쟁 겪고, 새마을 운동 겪으면서 농촌 전체가 와해되는 과정에 살았던 가난한 시골 아낙네들의 글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이거 내도 괜찮겠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지만 결국은 우리 시골에 있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그러면서도 결코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켰던 그런 농사꾼들의 부인 이야기가 없었던 거죠. 굉장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 선생님은'섬진강이 나의 전부다' 이런 말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 때 섬진강을 쓸 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사실 농촌공동체 문화가 많이 살아 있고, 남아 있을 땐데, 그 때는 강물이 조금은 살아 있었어요. 물고기도 많고, 우리 동네 목욕(수영)도 갈 수 있었고, 근데 90년대 넘어 오면서 강물이 완전히 죽었죠. 그러다 보니까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것이죠. 강물이 죽어서 저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죠.(웃음) "

 

- 제가 보기에 '섬진강 1'은 대단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죄송한 얘기지만, 그 뒤에 그런 수준의 시가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그것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을 하죠. 그러다가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가 나오면서 약간 회복을 했고, 7-8년 후에 '나무'라는 시집을 냈는데,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고…. 몇 년전에 '수양버들'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 때 약간 문학적인 회복기였는데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 섬진강을 쓰면서 젊어졌죠. 자신감이 붙어서, 나는 지금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 저도 시골에서 자랐습니다만, 산만 있고 개울이 있고 그러면 대개 답답하게 느끼는데 그것을 시로 만들고, 자기화시키고 그런 게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선생만 했잖아요.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교사라는 게 굉장히 폐쇄적이고, 굉장히 한 쪽에 있죠. 교육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근데 저는 문단에 나온 이후로 세상과 한번도 뒤떨어져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저는 공부를 한 거죠. 끊임없이 책을 읽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죠. 아마 지금도 현실과 팽팽하게 긴장감을 갖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죠."

 

- 선생님은 시를 참 쉽게(?) 쓰는 것 같습니다. 안도현 시인 같은 경우, 단번에 쓰지 못하고 50번을 고치는 경우도 있다는데?

 

"저는 시를 대개 한 번에 다 씁니다. 예를 들어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도 한두 달에 다 썼고,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써지면 한두 달 정도 시를 집중적으로 씁니다. 그러면 한 권이 거의 돼요."

 

- 창작과정에서 시와 동시의 차이는 뭘까요?

 

"시작이 다르죠. 근데 보면 하나죠. 시든 동시든 산문시든 그게 하나인 거죠.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시를 쓰기도 하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시를 쓰기도 하는데, 제 시는 일단 그림이 먼저 그려집니다. 그리고 가락이 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 바람이 나뭇가지에 불듯 이렇게 흐름이 있죠. 제 시는 노래로 만든 게 굉장히 많습니다."

 

- 선생님 글은 시 못지않게 산문이 빼어나다고 느낍니다. 시와 산문의 경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음악성과 미술성이 있어야죠. 특히 음악을 떠나서 시를 생각할 수가 없죠. 우리 인간이 하루하루를 사는데 삶에 리듬이 있잖아요. 그 리듬을 떠나서 똑똑 끊어서 삶을 살 수 없잖아요. 사실 산문이 더 어려울 때도 많죠. 산문은 사회를 닮아야 하고, 사회문제를 담아야 되죠."

 

- 선생님은 38년간 교직에 계셨고 고향인 임실 인근에서만 근무했습니다. 그 중 26년 동안 2학년 담임만 맡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개인적으로는 2학년이라는 게 시간이 좀 많이 있죠. 오후 수업 안하고. 2학년에게 배울게 너무 많아요. 닳아진 인간이 아닌 거죠. 충동적인 인간들이예요. 말하자면 고정되어 있는 관념이 없습니다.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하루하루 부딪치는 게 너무 너무 재밌는 거예요. 또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비함을 가졌어요. 그래서 감동을 줘요."

 

- 선생님은 창의력 교육을 중시합니다. 창의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놀이, 자연을 접할 기회, 독서,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입니다. 논다는 것은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란 대상만 있는 거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만 있는 거죠. 이게 차이가 나는 거죠. 놀이는 상대가 있어서 나를 죽이고 맞춰야 되는 거예요. 대상은 내 맘대로 해버려도 되는 거고.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혼자 내 맘대로만 하다보니까 개념이 없어지는 거죠. 상대가 아파하는지, 안 아파하는지 모르는 거죠. 괴로워하는 것을 몰라 버리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왕따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고, 가치관의 혼란이 생기고, 영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대상은 영혼이 없는 거잖아요. 무서운 일이죠."

 

- 오랜 경륜에 비추어 우리 교육의 해결책을 뭐라고 보십니까?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교육이 그 동안 계속 정치권력에 의해서 좌우된 것입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적 차원의 교육 계획이 필요합니다. 학교 현장으로 들어가면 학교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다는 거죠. 이게 가장 치명적입니다. 또 큰 문제 중 하나가 교직원의 승진제도를 지금처럼 놔두고는 교육을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개방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대와 사범대가 지금 체제로 가면 절대 안됩니다. 4년 동안 죽어라 시험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으로 들어오면 우리나라는 가정 자체가 애정과 사랑으로 뭉쳐진 아름다운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가정은 없고 가족만 있는 거죠. 너무 썰렁하고 무서운 일이죠. 또 제일 큰 문제는 기업들이, 어떤 애들을 뽑느냐에 따라서 교육제도가 바꿔지는 거죠."

 

- 임실군에서 짓자는 '김용택 문학관'은 거부하고, 작은 학교를 준비하고 계시는데요?

 

"임실군에서 문학관을 자꾸 얘기해서, 제가 감당 못하고, 제가 살아있는 사람인데 무슨 문학관을 짓느냐 했습니다. 시골집에 작은 학교를 짓고 있는데 지금은 덕치초등학교에서 매월 둘째, 넷째주 10시에 제가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농식품부에서 예산을 받아, '섬진강 A+A(Art와 Agric ulture) 타운벨트' 라고 김용택 송만규 임동창해서 돈이 40 몇 억이 나왔습니다. 한 개인한테 14억이 배정 되었는데 그 중 6억은 시설을 합니다. 나머지는 마을을 가꿉니다. 저의 집과 땅을 기부채납했습니다. 관리실하고, 조그만 강당 하나 짓고, 거기서 제가 기거하면서 가르칠 것입니다."

 

- 선생님은 오늘이 있기까지 독서량이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책을 멀리하는 추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문입니다. 전라북도에서 나오는 신문은 전라북도의 모든 중요한 문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바둑까지 모든 일을 담아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이건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책입니다. 신문을 안보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죠. 저는 종이신문을 3개 봅니다. 정말 꼼꼼하게 보죠. 그리고 사설과 칼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를 봅니다. 왜냐면 헤드라인이라는 게 신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잖아요. 그리고 모든 신문의 기획기사를 반드시 읽습니다."

 

-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해 왔습니까?

 

"저희 아들한테 늘상 이런 얘기를 했어요. 공부를 잘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지만, 그것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자기가 창조하면서 살아야 된다, 학교가 왜 중요하냐? 학교는 다니다가 다니기 싫으면 말아라. 안 다녀도 좋고, 대학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원하는 가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삶을 가꿔가고 꾸려가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공무원들만 좋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이해를 못합니다. 20살 30살 때 안주 하지 마라. 방황하고 좌절하고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껴서 60살 70살 때 성공한 삶을 살아라. 우리 애들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 먼 미래를 내다보시는군요?

 

" 100세 시대잖아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절대 하지마라.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은 어머니가 하면 되지, 왜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아들에게 시키려고 하냐. 아버지 말을 듣지 마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일은 아버지가 하게 해라. 선생님 말을 듣지 마라. 네가 좋아하는, 네 맘이 시키는 일을 하라. 그런 거죠."

 

- 전북 문학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전북이 예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문화예술 자체가 굉장히 빈약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피나는 수업과정, 거의 도(道)를 닦는 것 같은 문학적 고행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러질 않아요. 문화예술 전반적으로 보면 너무 나이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문화예술을 장악해 왔습니다. 이게 문화예술계의 큰 병폐죠. 문화예술지원정책을 혁신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 김용택 시인과 본보 조상진 선임기자가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