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출신 역대 국회의원 - 국가 기틀 확립에 큰 힘…4·19이후 야당 색채 짙어

라용균·배헌·백관수 등 제헌의원 22명 입성 / 이철승·양일동·홍영기 등 거물 정치인 등장

전북의 정치사는 굴곡진 근대 한국정치사 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나 전북 정치인들은 정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중심에서 위기를 극복해왔다. 한국 정치사에서 전북이 항상 비중있게 논의되는 이유다.

 

 전북의 정치사는 지역내 소속 정당 분포를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크게 3단계로 나뉘어진다. 군소정당과 무소속이 전성기였던 제헌국회∼5대 국회까지의 1단계, 5·16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의 여·야가 공존한 6대∼12대까지 2단계, 그리고 민주당이 독식체제를 구축한 13대∼18대까지 3단계로 분류된다.

 

 제헌국회때부터 18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전북 정치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 제헌국회~5대

 

1948년 5월10일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북에서는 22명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제헌국회의원이 총 198명(1년후 2명 추가 선출)인 점을 감안하면 전북의 비중은 상당했다. 이번 19대 국회의 전북 의원은 11명(전국 300명)이다.

 

이 같은 추세는 1960년 개원한 제5대 국회까지 이어졌다. 전북 의원은 2대 22명(전국 210명), 3대 22명(전국 203명), 4대 23명(전국 233명), 5대 민의원 24명(전국 233명) 참의원 4명(전국 58명)이었다.

 

1948년 7월1일 임기가 시작된 제헌국회는 7월17일 헌법 공포와 7월20일 초대 대통령(이승만) 선출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 임기는 2년이었다.

 

제헌의원의 소속 정당은 다양했다. 특히 무소속이 강세를 띠었다. 전북에서도 22명 가운데 만주무관학교 출신의 배헌(이리) 의원을 비롯해 무소속이 8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신현돈(무주, 전북도지사 역임) 의원이 소속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6명), 한국민주당(4명), 조선민족청년단(2명), 대동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농민회(각 1명)가 이었다.

 

전북출신 제헌의원 가운데는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백관수(고창을, 한국민주당) 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낸 라용균 의원(정읍갑, 한국민주당)이 눈에 띈다. 독립운동가인 라 의원은 정읍에서 무투표로 당선됐다. 상임위에서는 백관수 의원과 무소속의 신성균(전주) 의원이 각각 초대 법제사법위원장과 내무치안위원장을 맡았다.

 

△ 2대 무소속 3대 자유당 많아

 

1950년 5월30일 선거를 통해 구성된 2대 국회는 권력구조를 둘러싼 정권싸움이 치열한 시기로, 정부와 국회간의 대립이 심했다. 선거에서는 제헌국회때 참가하지 않았던 남북협상파와 중도 계열이 참여하면서 평균 경쟁률이 10대1을 넘어설 정도로 치열했으며, 전체 210명중 무소속이 126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전북에서도 22명중 15명이 무소속이었다. 나머지는 민주국민당 3명과 대한국민당 2명, 대한노농청년연맹과 여자국민당이 각 1명씩이었다.

 

상임위에서는 대한민국항공회사 사장을 역임한 신용욱(고창을, 무소속) 의원이 교통체신위원장을 맡았다.

 

의원중에는 초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하고 제헌국회때 보궐선거(안동을)에서 당선된 임영신(여) 의원이 금산(현재는 충남)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헌정회 원로회 의장을 지낸 송방용(무소속) 의원이 김제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개원 1주일만에 6·25전쟁이 발발, 부산에서 피난국회를 여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전쟁중에 최윤호 의원(김제을, 무소속)이 사망했고, 박영래(완주을)·신석빈(정읍갑)·최병주(부안, 이상 무소속) 의원이 납북됐다.

 

3대 총선(1954년 5월20일)에서는 처음으로 입후보자 정당공천제가 실시됐다. 정당정치의 기틀이 마련된 선거로, 여당인 자유당이 114석을 차지했다. 민주국민당은 15석으로 제1야당이 됐고, 무소속도 68석에 달했다.

 

지역에서도 자유당이 득세했다. 22석 가운데 이존화(완주갑) 의원 등 자유당이 11석을 차지했고,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김판술(군산) 의원 등 단 2석에 불과했다. 무소속은 9석으로, 무소속의 정준모(장수) 의원이 사회보건위원장에 선출됐다. 야당인 민주국민당 김판술 의원은 이후 민주당 정책위원장·사무총장을 거쳐 11대때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중구에서 당선돼 3선을 역임했다.

 

60년말과 70년대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이철승(전주을)·유진산(금산)·양일동(옥구) 의원이 3대때 무소속으로 국회에 첫 입성했다. 이철승 의원의 이때 나이는 32세였다.

 

△ 4대 야당 우세 5대 민주당 압승

 

4대와 5대 국회는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4대 국회(1958년 5월2일 총선)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후 1960년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개정 헌법이 공포되면서 그해 6월 해산됐고, 5대 국회(1960년 7월29일 총선)도 개원한지 1년이 채 못된 1960년 5월16일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해산됐다.

 

4대 총선에서는 전국적으로 여당인 자유당(126명)이 민주당(79명)을 크게 앞섰지만, 전북에서는 유진산·유청(전주 갑)·이철승 의원 등 민주당 의원 12명이 당선되는 등 야당이 우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전북은 야당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자유당은 김원전(군산)·이존화 의원(완주갑) 등 9명이었고, 무소속은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양일동 의원(옥구) 등 3명이었다.

 

과도정부에서 치러진 5대 총선에서는 민·참의원 동시선거가 치러져 양원제 국회가 구성됐다. 민주당은 전체 233석(민의원) 가운데 175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전북에서도 민주당이 24석 가운데 17석을 차지했다. 무소속은 6석, 사회대중당은 1석이었다. 참의원도 4명이 선출됐다.

 

민주당의 라용균·유진산·이철승·윤제술(김제을), 유청·양일동 의원 등은 3선 및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5선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홍영기(순창, 민주당) 의원도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