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의 메카니즘이 상호 의존적인 상황에서 언뜻 보기에 무모해보이는 행동이나 선택이 고도의 전략적 대안이될 수 있다
서양영화의 장면 하나. 지역의 패권을 놓고 또는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알력이 생긴 두 조폭조직의 두목들이 게임을 통해 승부를 가르기로 한다. 조직원 한명씩 올라탄 자동차 두 대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다가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지게 되는 배짱게임이다. 겁장이가 되면 지는 게임이어서 치킨게임이라 불린다. 용맹과 배짱이 무기가 되는 게임이지만, 서로가 끝까지 배짱을 과시하며 정면을 향해 돌진했다가는 둘 다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단순한 용맹이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승리의 관건은 나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돌진할 것이라는 확신 또는 두려움을 상대방의 뇌리에 심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직원 중에 아주 영리한 '똑똑이'보다 '얼간이'를 차출해 운전석에 앉히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 될 수 있다. 얼간이의 경우 아무 생각없이 운전을 하다보면 우연히 정면돌진을 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예측불허의 행동이 곧 상대방에게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는게 묘미이다. 또한 평소 무시를 당해오던 얼간이라면 이 기회를 이용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겠다는 공명심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치열한 비즈니스경쟁에서 가끔씩 상식 밖의 결정을 내리거나 또는 CEO가 회사의 손익에 관계없이 경쟁사에게 지는건 못참는다는 식의 평판을 쌓아두는 것이 의외로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예시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굵은 철사로 핸들을 칭칭 감아 아예 핸들을 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해둘 수도 있겠다. 또는 핸들을 아예 뽑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유혹을 스스로 차단시키고 자신을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벼랑끝으로 일부러 몰아세움으로써 역으로 상대방의 선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고도의 게임전략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핸들이 고정되었거나 또는 아예 뽑혀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피하는 것은 이미 나에게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곧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미의 아즈텍에 상륙하자마자 부하들과 적들이 보는 앞에서 타고온 배들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숫적으로 절대열세였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스페인 코르테스장군의 배수진전략과 같은 맥락이다.
2000년대 중반 이래 삼성 등의 국내업체들과 일본, 대만 등의 해외업체들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반도체 시장점유율 경쟁이 치킨게임의 예로 널리 인용된다. 이 경쟁이 치킨게임이 되는 진정한 이유는, 스마트폰처럼 공급업체들이 직접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라 업체들은 공급물량만을 선택할 수 있고 가격은 수요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구조의 특성 때문이다. 가격폭락의 와중에도 감산은 곧 패배를 의미하기에 업체들은 서로 물러서지 않고 경쟁적으로 공급을 늘이면서 상대방이 감산하기만을 기대하는 배짱게임이 된 것이다.
이 반도체시장의 치킨게임에서 삼성이 최후의 승자로 된 이면에도 바로 벼랑끝전술의 묘수가 숨겨져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표면적으로는 공급물량을 통해 벌인 경쟁이지만 승리의 진정한 견인차는 삼성이 대규모의 생산설비 자체를 선점증설한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산설비의 증설은 곧 삼성에게 감산은 별 매력있는 대안이 아님을 의미한다. 경쟁업체들이 감산을 하건 증산을 하건 삼성은 이미 완공되어있는 설비를 이용하여 작은 가변비용만으로도 쉽게 증산을 할 것임을 확신한 경쟁업체들은 결국 감산을 선택하게 되고 종국에는 적자 또는 도산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의사결정의 메카니즘이 상호간에 서로 의존적으로 얽혀있는 게임적 상황에서는 언뜻 보기에 무모해보이는 행동이나 선택이 보이지 않는 고도의 전략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경제학의 역설적 가르침이다.